존엄을 나누는 시간 ‘3000원 김치찌개’···전주 ‘청년식탁 사잇길’ 가보니

김창효 기자 2026. 3. 30. 21: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전북 전주시에 있는 식당 ‘청년식탁 사잇길’을 찾은 시민들이 한 끼 식사를 하고 있다.

천주교 전주교구의 ‘식탁 연대’
정해진 가격 있지만 식비 ‘자율’
“밥이 곧 인권”…차별 없는 환대
문화 공간·상담소 등 역할 확장

물가가 계속 오르며 “밥 한 끼 하자”는 인사가 무거운 시대다.

고물가 시대의 그늘 속에서 2023년 3월10일, 전북 전주시 전북대학교 신정문 인근 건물 2층에 특별한 식당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메뉴가 김치찌개 단 한 가지다. 대신 단돈 3000원이면 따뜻하고 든든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천주교 전주교구가 경제적·사회적으로 고립된 청년들을 돕기 위해 만든 ‘청년식탁 사잇길’이다. ‘사람’을 잇고, 청년과 사회를 연결하는 골목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지난 23일 오전 찾은 이곳은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와 갓 지은 밥 냄새가 퍼졌다. 취지는 고립 청년을 위한 곳이지만, 이곳에선 대학생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한 세대가 자연스럽게 어울려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민센터 식권을 들고 온 홀몸 어르신과 학교 밖 청소년도 이곳의 ‘식구’다.

어느새 지역 위기 계층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노숙인·노약자·위기청년·자립준비청년 등을 대상으로 바우처 쿠폰 3000장을 발행해 2500장을 배포했고, 약 2000장이 실제 식사로 이어졌다. 올해 상반기도 2500장을 발행해 현재까지 15개 기관·단체에 1360장을 전달했다. 나눔의 반경은 꾸준히 넓어지고 있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문턱 없는 식당’이라는 점이다. 메뉴판에 가격이 적혀 있긴 해도 입구 키오스크에는 정해진 가격이 없다. 0원부터 1만원까지 이용자가 직접 선택하는 ‘자율 식비제’다. 형편이 어려운 날 0원을 눌러도 누구 하나 눈치를 주지 않는다.

김회인 바오로 신부(사잇길 대표)는 “무료라는 말이 오히려 사람들을 위축시킨다”며 “도움을 받는 존재로 규정되는 순간 낙인이 찍히고 자존감이 무너질 수 있다. 밥이 곧 인권”이라고 설명했다. 아침 식사는 2000원, 점심·저녁 김치찌개는 3000원. 청년 9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가격’을 반영했다. 돈 없어도 당당하게 식사할 수 있는 경험, 그것이 사잇길이 말하는 ‘존엄’이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음식의 질까지 낮은 것은 아니다. 직접 우린 육수에 돼지고기, 두부, 콩나물이 넉넉히 들어간 김치찌개는 여느 식당 못지않다. 전북대 학생 이민성씨(25)는 “요즘 1만원으로는 한 끼 해결하기도 어려운데, 이 가격에 이런 양을 먹을 수 있어 정말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지역사회의 반응도 뜨겁다. 발달장애인 주간활동서비스 기관 ‘나무의 꿈’ 민수영 센터장은 “이곳에 온다고 하면 이용자들이 모두 들뜬다”며 “차별 없이 환대받는 가장 편안한 외식 공간”이라고 전했다.

사잇길은 이제 단순한 식당을 넘어 청년 삶 전반을 아우르는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노나먹자’ 사업을 통해 하루 세 끼를 지원하고, 무료 라면을 제공하는 ‘전주 함께라면’도 운영한다. ‘노나놀자’ 사업에서는 무료 상담소 ‘마음길’, ‘삼천원 아카데미’ 등을 통해 정서적·지적 지원을 이어간다. ‘노나보자’ 사업은 영화제와 만찬회, 치유 걷기 프로그램 등을 통해 청년 간 연대를 만들어낸다.

지역사회의 생존과 존엄을 지키는 이 같은 ‘사회적 안전망’이 일부 개인과 종교계의 헌신에 기대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사잇길은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해 자생력을 키우고 있지만, 지자체의 지원이나 정책적 뒷받침은 여전히 부족하다. 30일 서원태 청년 매니저는 “운영비는 대부분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운영진이 직접 식자재를 수거하는 등 어려움이 있지만 보람을 느끼며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글·사진 김창효 선임기자 ch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