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동에서] ESG, 선언의 시대가 저물고 '증명'의 시대가 왔다

김영균 2026. 3. 30. 19:4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김영균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한때 기업 경영의 새로운 '메타포'처럼 등장했다.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춘 기업이 장기적으로 승리한다는 담론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사이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발적 노력과 선언의 시대는 저물고, 이제 ESG는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규제이자 리스크로 변모하고 있다.

기업의 ESG 홍보는 위장환경주의(그린워싱)로 나타난 경우가 많았다. 이는 기업에는 경제적 손실이나 브랜드 가치의 퇴색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과거에는 친환경을 마케팅 영역으로 소비했지만, 이제는 구체적 데이터가 따르지 않는 선언은 치명적인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국내에서는 한 화장품 브랜드가 '페이퍼 보틀'을 표방하며 종이 포장재를 강조했지만, 내부에 플라스틱 코팅이 포함된 제품이란 사실이 알려지며 소비자 신뢰가 급락했다. 독일의 자산운용사 DWS는 ESG 투자 비중을 부풀렸다는 혐의로 당국의 압수수색을 받았고 막대한 벌금을 물었다. 이제 시장은 오직 '객관적 데이터와 검증 가능성'만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국내외 규제 기관의 태도는 명확하다. 문제는 "거짓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소비자가 오해할 소지가 있었느냐"에 방점을 찍는다.

유럽연합(EU)의 '그린클레임(Green Claims) 지침'은 한발 더 나간다. 기업이 친환경 주장을 하려면 사전에 공인된 기관의 검증을 받아야 하며, 이를 어길 시 막대한 벌금을 물릴 수 있도록 했다. ESG가 더 이상 '하면 좋은 것(Nice to have)'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Must do)' 강력한 법적 강제력을 갖게 된 것이다.

EU의 ESG 규제는 이제 실질적인 '무역 장벽'으로 작동하고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나 산림파괴방지법(EUDR) 등은 ESG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제품의 EU 시장 진입을 법적으로 금지하거나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수출길을 원천 봉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업의 질문은 본질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ESG를 잘 홍보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ESG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이를 위해 CEO는 다음 네 가지 구조적 변화를 실행해야 한다.

첫째, ESG를 '자본 배분의 기준'으로 격상해야 한다. 친환경 목표 선언보다 설비 투자·R&D를 판단 시 ESG 가치를 실질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보상 체계를 재설계해야 한다. 성과 지표에 ESG 요소가 구체적인 수치로 포함되지 않는다면 조직은 움직이지 않는다. ESG는 캠페인이 아니라 '돈과 승진'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셋째, 커뮤니케이션의 기준을 낮추고 검증의 기준을 높여야 한다. 측정할 수 있는 범위와 구체적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리스크를 줄이는 길이다. 넷째, 실질적인 ESG 감독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최고경영자가 결정한 사안이 실제 투자와 인사, 생산 공정에 어떻게 녹아들고 있는지 이사회나 특정 조직이 정기적으로 감시하고 책임을 묻는 구조가 필요하다.

글로벌 시장은 이미 ESG를 '위험한 기업을 걸러내는 필터'로 사용하고 있다. 기후 규제는 비용으로 환산되고, 노동 문제는 브랜드 가치에 직격탄을 날리며,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투자 철회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 결국 ESG의 본질은 규제를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규제를 견딜 수 있는 '경영 체력'을 기르는 데 있다.

선언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시장과 규제 당국은 기업에 단 하나의 답을 요구하고 있다. "당신의 ESG는 누가 책임지고 있으며, 당신의 데이터는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없는 기업에 다음 페이지는 없을 것이다.

/김영균 인천대학교 경영대학 학장

Copyright © 인천일보 All rights reserved - 무단 전재, 복사,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