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정의 와인 이야기] – 파리의 심판 50주년 불화의 여신이 사과를 건네 생긴 일들

김기정 매경GOLF 기자(kim.kijung@mk.co.kr) 2026. 3. 30.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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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심판 50주년을 맞아 캘리포니아와인협회 주최로 한국서 진행된 세미나에서 일레인 추칸 브라운이 파리의 심판이 와인업계에 가져온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신들의 결혼식 잔치에 황금사과를 던집니다. 사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서로 사과를 차지하려는 여신들의 다툼으로 잔칫상은 난장판이 됩니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불화의 여신이 결혼식에 오는 걸 꺼려 에리스를 초청하지 않았고, 화가 난 에리스는 분풀이로 이 같은 일을 꾸민 겁니다.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튑니다.

여신들의 싸움으로 난처해진 제우스가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판단하는 일을 양치기 목동 파리스(Paris)에게 맡깁니다. 파리스가 가장 잘 생긴 남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리스는 원래 트로이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나라를 망하게 할 운명”이란 신탁을 받고 어렸을 때 버려져 목동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여신들은 파리스에게 자신을 뽑아달라며 선물을 제시합니다. 제우스의 부인 헤라는 ‘권력’을, 전쟁의 신 아테나는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사랑’을 약속합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하고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렌을 아내로 얻습니다. 이로 인해 벌어질 끔찍한 재앙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죠.

17세기 유럽의 대표 화가인 루벤스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즐겨 그렸습니다. 그의 명화 <파리스의 심판>(The Judgment of Paris)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불화의 여신이 던진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건네 주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여기서 잠깐. 와인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파리의 심판’ (Judgment of Paris)이란 용어를 들어 봤을 겁니다. 지난 1976년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 시음회에서 프랑스 와인을 꺾으며 와인 업계의 판도를 바꾼 사건입니다. ‘파리스의 심판’과 이름이 비슷하지요? ‘파리의 심판’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세미나 참석자가 캘리포니아 와인산지 지도를 살펴보고 있다.
파리의 심판’이 시작된 날

파리에서 와인숍을 운영하던 영국인 와인 전문가 스티븐 스퍼리어는 1976년 5월 24일 파리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프랑스 와인과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을 비교 시음하는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크게 주목을 끈 이벤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와인은 “미국에서도 꽤 마실만한 와인이 생산된다” 정도의 인식이 강했습니다. 미디어도 초청을 했지만 대부분의 기자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프랑스 와인이 이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력 언론인 중에는 <타임>(Time) 매거진에서 프랑스와인과 음식을 소개하던 조지 태버가 유일하게 참석합니다.

태버 기자가 쓴 <타임> 기사에 따르면 비교 시음회에는 9명의 프랑스 와인 업계 관계자들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연합회 사무총장 등 와인 업계에서는 누구나 알 만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시음 와인은 4개의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과 6개 캘리포니아 화이트 와인이 포함됐습니다. 포도 품종은 샤르도네. 레드 와인으로는 4개의 보르도 지역 그랑크뤼 샤토와 6개 캘리포니아 와인이 출품됐습니다.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심사는 상표와 생산지역이 적힌 레이블을 가린 채 블라인드로 진행됐던 모양입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혼란이 계속됐죠. 한 평가자는 1972년산 캘리포니아 샤르도네를 마시고는 “아, 프랑스 와인이네”라고 외쳤고 또 다른 평가자는 1973년산 바타르 몽라셰의 향을 맡더니 “이건 무조건 캘리포니아 와인이야. 향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바타르 몽라셰는 프랑스 부르고뉴 코트 드 본 지역 최고 그랑크뤼 밭에서 나온 샤르도네 와인입니다.

마침내 최종 평가점수가 공개됐습니다. 먼저 레드 와인 1등은 1972년산 캘리포니아 와인 스택스 립 와인 셀라(Stag’s Leap Wine Cellars)가 차지했습니다. 무통 로칠드(1970), 오 브리옹(1970), 몽로즈(1970) 등 프랑스 보르도 와인들이 뒤를 이었습니다. 화이트 와인 역시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인 샤토 몬텔레나(Chateau Montelena) 1973년 빈티지가 1위에 올랐습니다.

조지 태버 기자의 기사 제목은 ‘파리의 심판’이었지만 기사에는 ‘파리의 심판’이란 문구가 없습니다. 시음회 상황과 결과만 대단히 드라이하게 다뤘을 뿐입니다. 신문사나 잡지사에는 보통 취재해 글을 쓰는 취재기자와 별도로 취재기자의 글을 읽고 제목을 달고 기사의 레이아웃을 결정하는 편집기자가 따로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편집기자가 그리 스 신화 속 ‘파리스의 심판’(The Judgment of Paris)에 영감을 받아 제목을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라고 뽑아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프랑스 와인 업계는 반발했고 프랑스 언론은 무시했습니다. 1970년 빈티지를 1976년에 마셨으니 ‘시음 적기가 아니다’라는 논리였습니다.

“와인은 시간을 담은 예술작품이야. ‘숙성’의 의미도 잘 모르면서 와인을 시음하다니.”

사실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포도 품종을 주로 사용하는 프랑스 보르도의 그랑크뤼급 와인들은 20년 이상 숙성되어야 절정의 맛에 오른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래서 2006년 ‘파리의 심판’ 30주년을 맞아 30년 이상 숙성된 같은 빈티지의 와인을 비교 시음하는 행사가 또 열리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의 ‘숙성잠재력’만 과시하며 논란은 일단락됐습니다. 캘리포니아 와인은 “지금 당장 마셔도 맛있고, 시간이 지나 숙성시켜 마셔도 맛있다”라는 평가를 얻습니다.

캘리포니아와인협회 주최로 서울서 열린 파리의 심판 50주년 세미나에 소개된 와인들.
생산지, 포도 품종 확장 의미

올해는 ‘파리의 심판’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미국 건국 250주년과 파리의 심판 5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도 캘리포니아와인협회(CWI) 주최로 기념 세미나와 캘리포니아 와인 얼라이브 테이스팅 2026(California Wines Alive Tasting 2026)이 열렸습니다. 세미나에는 와인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는 일레인 추칸 브라운이 강연자로 나와, 50년 전에 있었던 파리의 심판이 갖는 의미와 그이후에 캘리포니아 와인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살펴보는 기회였습니다.

추칸 브라운은 1976년 파리의 심판을 통해 와인 생산지가 프랑스 외 타 지역으로, 포도 품종도 다양하게 확장됐다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파리의 심판으로 캘리포니아 와인이 세계 최고 프랑스 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파리의 심판은 캘리포니아 와인뿐 아니라 전 세계 다른 와인산지의 가능성을 알려줬다”라면서 “샤르도네, 카베르네 소비뇽 외에 다른 와인 품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파리의 심판’ 기획자가 스티븐 스퍼리어였다면 ‘파리스의심판’ 기획자는 여신 에리스였습니다. 불화의 여신이 의도한 대로 파리스의 심판은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파리스가 아내로 맞은 절세미녀 헬렌은 이미 이웃 국가 스파르타의 왕비였습니다. 스파르타의 왕은 아내를 빼앗기고 분노합니다. 스파르타의 왕은 자신의 형이자 그리스의 용장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침공합니다.

트로이 전쟁의 시작입니다. 그리스 최강의 전사 아킬레우스와 트로이 왕의 장자 헥토르(파리스 왕자의 형)의 대결로 비극의 서사는 절정에 이릅니다. 결국 ‘트로이 목마’에 숨었던 그리스 병사들이 트로이 성안에 잠입해 트로이를 멸망 시킵니다. 혹시 그리스 신화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트로이>를 보시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내용이기도 한데 정작 <일리아스>에는 트로이 목마 얘기는 없다고 합니다. 신탁의 예언처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결국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키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권력(헤라)이나 지혜(아테나)를 선택하지 않고 미녀(아프로디테)를 선택한 순간의 결정이 전쟁과 조국의 멸망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겁니다.

이런 교훈을 담은 ‘파리스의 심판’은 루벤스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소재가 됐습니다. 미술관에 3명의 여인이 누드 또는 세미 누드로 서 있고 남성이 거만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 사과를 건네 주는 그림이 있다면 그건 ‘파리스의 심판’을 묘사한 그림일 확률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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