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둔 7년 감옥에서 나왔다”…농촌서 ‘자립’ 싹틔우는 은둔청년들

이연경 기자 2026. 3. 3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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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프코리아·안무서운회사, 은둔청년 위한 3박4일 농촌 일손돕기 마련
남녀 은둔청년 4명, 횡성 갑천면 농가에서 일손 도우며 숙식 제공받아
알바 지원 999번해도 거절뿐…실업급여도 못 받는 ‘은둔청년’
농장주와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며 ‘식구’의 가치 깨달아
“우리같은 은둔 청년들을 세상에 나오도록 돕고 싶어요”
자립을 준비하는 ‘은둔고수’ 장영서(왼쪽 세번째부터)·김기주·김민설·신현재씨와 노아의숲을 운영하는 박주원 대표(왼쪽 두번째)와 진영숙 원장(오른쪽 첫번째)이 막 돋아나는 산마늘밭을 배경으로 서있다.

강원 횡성군 갑천면의 관광농원 ‘노아의 숲’에서 우프코리아(대표 김혜란)와 안무서운회사(대표 유승규)가 18~21일 3박4일간 ‘고립·은둔 청년 치유를 위한 우프(WWOOF·세계 유기농농장 일손돕기 체험) 활동’을 진행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일손돕기였지만, 일손돕기를 위해 모인 4명의 청년은 각자 짧게는 5년, 길게는 7년 이상 세상과 단절했던 은둔청년들이다. 읍내에서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외진 시골이 은둔청년들에게는 망가진 일상을 복원하고 타인과의 신뢰를 회복하는 사회 복귀의 전초기지가 됐다.

◆“999번 거절당해도, 죽기엔 삶이 너무 아까웠다”=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장영서씨(25)의 이야기는 은둔청년들이 겪는 아픔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장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겪은 성폭행 트라우마와 주변의 폭언, 방치 속에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군대에 입대해 만기 전역했으나 사회는 여전히 차가웠다.

야간 시간대 편의점 등 온갖 아르바이트 지원만 999번 넘게 했지만 돌아온 것은 거절뿐이었기에 실업급여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다. 용기를 내 세상에 나왔지만 계속되는 실패와 “나약하고 게을러서 그렇다”는 주변의 차가운 말에 다시 방으로 숨어들기를 반복했다.

이때마다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포기하기에는 내 삶이 너무 아깝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남들이 보면 별것 아니어도 내 삶에서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더라”며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은둔청년을 돕는 곳을 찾아봤는데, 운좋게도 선정이 돼 우프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우프 활동에서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이어지는 자작나무 수액 채취 등 농촌의 일상에 몰입하며 오랫동안 머릿속을 짓눌렀던 생각에서 잠시 벗어났다고 밝혔다.

장씨와 함께 참여한 김기주(32)·김민설(26)·신현재씨(31) 역시 각자의 속도로 자립을 준비 중이다. 네 사람 모두 안무서운회사가 운영하는 셰어하우스에서 거주하다가, 우프코리아와 안무서운회사가 기획한 이번 프로그램에 자원하게 됐다.

7년간 자신의 방에서 은둔했던 김기주씨는 “도시에서는 자극이 너무 많아 마비됐는데, 농장에서 비로소 살아있음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은둔의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겪는 다른 청년을 이해하고 돕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은둔고수’들로, 이날도 이들은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산마늘밭 사이를 함께 누볐다.

◆핏줄보다 진한 ‘치유의 식구’…잃어버린 공동체를 농촌에서 찾다=이번 프로그램의 핵심은 단순한 일손돕기가 아닌 ‘관계의 회복’에 있다. 김혜란 우프코리아 대표는 농촌이 과거 방학 때면 찾아가던 시골 할머니 댁이나 친인척의 역할을 대신하며 청년들에게 잃어버린 공동체 경험을 선사한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집에서는 부모님의 잔소리로 들렸을 법한 이야기도 농장주와 식사를 나누며 듣다 보면 다르게 다가온다”며 “실제로 청년들이 부모님 세대인 농장주와 교감하며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핏줄은 아니지만, 먹거리가 나오는 흙을 만지고 식탁을 나누며 ‘식구’로 묶이는 과정 자체가 치유라는 분석이다.

청년들은 식사 시간이면 노아의숲을 운영하는 박주원 대표(73), 진영숙 원장(71) 부부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눴다. 박 대표는 21.5㏊(6만5000평)의 숲을 ‘150만 마리 미생물 일꾼이 사는 공존의 장’이라 소개하며, 청년들에게 나무뿌리의 균근처럼 서로 돕고 사는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신한은행 부행장과 미래에셋 사외이사를 역임했으나, 본인이 가장 행복한 것은 자연 속에 있을 때라는 것을 알고 귀농해 2016년 노아의숲을 열었다.

박 대표는 “지금껏 많은 사람이 농장에 왔다 갔지만, 세상에 벽을 쌓았던 은둔청년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내가 구글 폼 사용법을 몰라 골머리를 앓다가 은둔청년 신현재씨에게 물어보니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하며 설명해주는데 얼마나 고맙고 든든했는지 모른다”며 웃음 지었다.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가는 셈이다.

김 대표는 “농촌은 생산 공간을 넘어 심리적으로 위축된 도시민을 보듬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거대한 자원”이라며, “청년재단 등 기관과 협력을 확대해 강원 횡성과 영월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은둔청년 지원 모델을 구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프코리아는 연간 약 1억5000만 원의 자체 예산으로 우핑 사업을 운영 중이다. 우핑이란 전 세계 청년들이 친환경 농가에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숙식과 문화 체험을 상호 제공받는 프로그램이다. 이때 교통비는 청년이 부담한다.

우프 활동 참여 청년들이 트럭 위에 자작나무 수액을 옮기며 서로에게 응원을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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