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걸 칼럼] 케데헌·아리랑·왕사남, 그리고 문화영토

2026. 3. 3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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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걸 (재)문화영토연구원 이사장·국민대 명예교수


‘문화영토론’은 1980년대 초 한국의 문화적 원형과 가치가 갈등과 분열을 줄이고 세계인이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원자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문화영토론을 처음 주창한 전 고려대 총장 휘(諱) 홍일식 박사는 “문화 영토는 천하에서 가장 넓은 땅이고… 모든 민족과 국가를 포용하고도 모자라지 않은 영토이며… 배타적으로 경쟁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가치의 영토”라고 정의한 바 있다.

정치적·경제적 영토는 본질적으로 경쟁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문화 영토는 여러 민족과 국가의 문화가 한데 어울려 함께 누리는 인류 공영의 가치다. 오늘날 문화예술은 물론 음식과 상품, 예의와 도덕, 관광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소위 한류(K-Culture)의 돌풍이 세계를 휩쓰는 현상을 이미 50여년 전 문화영토론은 내다보고 있었다.

지난 3월 21일 저녁, 광화문에서 시청 앞 광장에 이르는 거리에 수만 명의 시민과 관광객이 모여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BTS의 컴백쇼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다. 당초 26만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됐으나 BTS 팬인 아미(ARMY)들을 중심으로 4만여 명이 모였고, 지나는 사람들까지 합쳐도 10만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넷플릭스를 통해 기획·제작되고 약 190여 개 국가에 생중계된 이 공연은 작게는 BTS의 인기를 실감케 했고, 크게는 우리 대중 문화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 전통문화와 역사, 그리고 거기에 스며있는 한국인의 심성이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문화 영토’의 선한 영향력을 웅변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특히 수만명이 운집해 함께 어우러진 공연이 끝난 후 모여든 팬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의 모든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바로 수일 전에 있었던, 지저분한 쓰레기로 가득 찬 오스카 시상식장과 대비되면서 공연뿐만 아니라 아미들이 지키려는 도덕성과 가치관이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들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세계인이 직접 목도했다.

한편 1500만 관객을 넘어선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가 인기를 끌면서 미국에서도 150여 개 극장에서 상영되고 한국어와 역사를 모르는 세계인들도 크게 공감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기생충’과 ‘미나리’, ‘오징어게임’ 등 한국적 정서가 물씬 나는 영화들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2025년 ‘케데헌’의 열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왕사남’이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청록파 시인으로 유명한 조지훈 선생의 장남 조광렬 씨(재미 건축가 겸 수필가)는 미국에서의 ‘왕사남’의 인기를 소개하면서 “죽음을 알면서도 옳은 일을 하는 것, 한국에는 유독 이런 이들이 많았다. 단종의 이야기는 이 영화 한 편으로 570년이 지나 태평양을 넘어 언어와 국경을 건너 사람들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다”고 썼다.

그는 ‘한국 역사는 몰라도 그냥 울었다’, ‘단종 사후 500년만의 장례식에 세계가 오열했다’는 등의 반응을 소개하면서 “심장이 먼저 뜨겁게 반응했고 역사는 따라왔다”고 썼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세계인이 감동했고, ‘권력 앞에서 무릎 꿇지 않는 것,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곁을 지키는 것, 죽음 앞에서도 사람의 도리를 잃지 않는 것’, 한국인의 그런 마음에 세계인이 열광했다고 했다.

그는 “아리랑은 단순히 슬픔과 회한을 달래는 노래가 아니다…. 원과 한을 승화시켜서 누구나 빛의 인간이 되어 AI 문명의 마지막 고개를 넘게 하는 아리랑 정신”, “그것이야말로 한류가 전 세계에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라고 썼다(미주한국일보, 뉴욕).

바야흐로 한국과 한국인의 정신문화와 역사, 가치를 소재로 인류가 함께 즐기고 감동하는 문화 영토의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유구한 문화와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진 한국인의 정서와 애환, 권력에 굴하지 않고 불의에 항거해 온 그 결연한 마음이 한국을 세계인이 공감하는 문화예술 선진국으로 올려놓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 정치만은 그토록 잔인하고 부도덕하며, 비인간적이어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가. 그래서 오늘은, 오늘만큼은 정치를 잊고 ‘케데헌’, 그리고 ‘왕사남’에 어린 정신과 가치를 느끼며 자랑스러운 ‘문화 영토의 시대’만을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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