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일본은 5팀, 한국은 HL 하나…그래서 더 뜨거운 정몽원의 빙판 30년

김종석 기자 2026. 3. 3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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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0번째 아시아리그 정상 도전, 2연패로 벼랑 끝…패배보다 강렬한 회장 존재감
-일본은 100년 역사, 한국은 홀로서기…척박한 현실 뚫고 일군 기적 같은 성과
-‘제2의 자식’처럼 팀 품은 홍인화 여사…조용한 뒷바라지가 만든 아이스하키의 온기
지난 30년 넘게 한국 아이스하키를 이끈 정몽원 HL 회장(가운데)이 HL 안양과 레드이글스 홋카이도의 챔피언결정전에 앞서 카메라 앞에 섰다.

29일 HL 안양 아이스링크의 공기는 팽팽했습니다. HL 안양과 일본 레드이글스 홋카이도의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챔피언결정전(5전 3선승제) 2차전. 빙판 위 승부는 냉정했지만, 관중석의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습니다. 2000명 가까운 팬들은 무료로 배포된 'One Team, No Limits'라고 적힌 푸른색 티셔츠 물결을 이루며 목청이 터져라 HL의 승리를 염원했습니다.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는 가운데 정몽원 HL그룹 회장과 부인 홍인화 여사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열띤 응원을 보냈습니다.

가족 단위 팬들의 응원전도 뜨거웠습니다. 휴식 시간마다 팬들이 정 회장에게 다가가 사인을 요청했고, 어떤 팬은 정 회장이 지난해 펴낸 에세이 '한국도 아이스하키 합니다'를 들고 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정 회장의 사촌형수이자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부인인 김혜영 한국브리지협회 회장, 최대호 안양시장도 열성적인 오너 부부의 아이스하키 사랑에 공감하듯 관중석에 자리했습니다.

HL 안양과 레드이글스 홋카이도의 경기 장면.

안양 아이스링크에는 HL 안양의 통산 9회 우승을 상징하는 배너가 걸려 있었습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5연패이자 통산 10회 우승의 대기록을 노렸지만, 이날 0-3으로 패하며 홈 1, 2차전을 모두 내줬습니다. 이제 HL 안양은 일본 홋카이도 원정에서 열리는 3, 4, 5차전을 모두 이겨야 하는 벼랑 끝에 몰렸습니다. 3차전은 4월 2일 열립니다.

절박한 상황에 놓였지만, 현장에서 더 오래 남은 장면은 겉으로 드러난 이번 시리즈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30년 넘게 한국 아이스하키를 떠받쳐온 정몽원 회장과 그 곁을 지켜온 가족의 존재감이었습니다.

정몽원 회장의 아이스하키 사랑은 단순한 후원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는 1994년 HL 안양의 전신인 만도 위니아를 창단한 뒤, 한국 스포츠계에서도 가장 척박한 환경 가운데 하나였던 아이스하키를 오랜 세월 붙들어 왔습니다. 이는 한 기업인이 비인기 종목을 후원했다는 차원을 넘어, 한국 아이스하키의 명맥 자체를 실제로 지켜낸 시간에 가깝습니다.

정 회장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맡아 한국 남자 대표팀의 세계선수권 톱 디비전 승격,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남녀 대표팀 본선 진출 등 굵직한 장면을 이끌었습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습니다. 최근에는 자신이 겪은 30년의 빙판 인생을 담은 책까지 펴내며, 아이스하키를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노력도 이어갔습니다. 정 회장의 30년은 결국 투자와 운영, 행정과 대중화 노력이 한데 얽힌 한국 아이스하키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정 회장의 진심은 HL 안양이 남긴 성과가 가장 또렷하게 증명합니다. HL 안양은 2025년 아시아리그에서 4년 연속 우승하며 역대 최다인 통산 9번째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런 성과는 기적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비인기 종목에서 한 팀이 30년 넘게 살아남고, 생존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 정상에 반복해서 오르는 일은 결코 우연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구단을 향한 애정, 종목을 포기하지 않는 인내, 현장을 중시하는 운영 철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래서 HL 안양의 9회 우승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 아이스하키가 얼마나 좁은 토대 위에서도 자존심을 지켜왔는지를 보여주는 압축된 기록입니다.

정몽원 HL 회장과 부인 홍인화 여사는 지난 30년 넘게 한국 아이스하키 발전에 헌신했다.

홍인화 여사의 내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홍 여사는 오래전부터 선수단과 구단을 세심하게 챙겨왔습니다. 정몽원 회장 부부는 아이스하키를 '제2의 자식'처럼 여겨왔습니다. 홍 여사는 선수들을 아들처럼 대해 경조사를 챙기고, 입대를 앞둔 선수를 집으로 불러 직접 밥을 해주고 용돈까지 챙겼습니다. HL 안양 프런트에 따르면 원정 경기 때는 선수단을 위해 명절 음식까지 싸 들고 갔고, 선수 가족이 아프면 병원 예약까지 알아봐 줬습니다. 평소 안양 아이스링크에서 운동하는 어린이·청소년 클럽 회원들의 얼굴도 일일이 알아보고, 마치 친손주처럼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홍 여사는 정 회장 못지않은 아이스하키 애호가입니다.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선수단과 현장을 묵묵히 보살펴왔다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가족의 동행'이라는 말로 축소하기 어려울 만큼 길고 깊었습니다. 2차전의 시작과 끝을 정 회장과 함께한 홍 여사의 모습은 그런 오랜 시간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풍경이었습니다.

HL 안양의 홈 링크에는 아시아리그 통산 9회 우승을 알리는 푸른색 배너 9개가 걸려 있다.

정몽원 회장과 HL 안양의 존재감이 더 크게 읽히는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아이스하키 토대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930년 아시아 최초로 IIHF에 가입했고, 1966년부터 2004년까지 자국 중심의 일본아이스하키리그(JIHL)를 운영했습니다. 아시아리그 체제로 넘어온 뒤에도 복수 구단이 리그의 중심축을 맡아왔습니다. 2025∼2026시즌 아시아리그만 봐도 일본 팀은 레드이글스 홋카이도, 닛코 아이스벅스, 도호쿠 프리블레이즈, 요코하마 GRITS, 스타즈 고베까지 5개 팀입니다. 반면 한국은 HL 안양이 유일한 팀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챔피언결정전에서 HL 안양과 맞선 레드이글스 홋카이도만 해도 1925년 오지 이글스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구단으로, 10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합니다. 일본이 오랜 역사와 두꺼운 선수층, 다수 구단 구조로 아이스하키를 키워왔다면, 한국은 HL 안양 한 팀이 외롭게 리그의 한 축을 떠받쳐온 셈입니다. 그래서 HL 안양이 그동안 거둔 성과는 더 묵직하고, 정몽원 회장의 30년은 더 특별하게 읽힙니다.

정 회장은 "내가 아이스하키협회 회장을 맡았을 때는 2018년 평창올림픽 덕분에 많은 지원과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큰 축복을 받았다. 앞으로 한국 아이스하키가 큰 걱정이다. 아이스하키 클럽은 전국적으로 잘 되고 있지만, 선수 배출로 연결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최근 한국 스포츠는 많은 종목에서 한때 대등하거나 앞섰던 일본에 크게 뒤처지고 있습니다. 구기 종목의 경우 일본과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이스하키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기에 정 회장의 근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정 회장의 뒤를 이어 대한아이스하키협회를 맡고 있는 양승준 회장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 보이는 이유입니다. 45년 넘게 선수와 행정가로 활동한 아이스하키 전문가인 양 회장은 "학생 운동선수의 훈련 환경 개선, 클럽과 학교 스포츠의 연계 등 저변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HL 안양 아이스하키 선수단은 누구보다 팬들을 소중히 여기는 팀으로 유명하다.

이번 시즌 마지막 홈경기를 마친 안양 아이스링크의 풍경은 많은 것을 상징합니다. 비록 아쉬운 패배를 남겼지만, 팬들은 경기장의 주인공을 단지 선수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빙판을 30년 넘게 지켜온 구단주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사인을 받고, 책을 내밀고, 사진을 함께 남겼습니다. 그것은 유명 기업인을 향한 호기심이 아니라, 한국 아이스하키의 명맥을 지켜낸 시간에 대한 존중에 가까웠습니다.

일본 아이스하키가 시스템과 역사로 버티는 나라라면, 한국은 오랜 시간 HL 안양과 정몽원 회장의 집념으로 버텨온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의 곁에는 홍인화 여사의 조용한 헌신과 가족의 응원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HL 안양의 최근 우승 기록은 더 빛납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끝내 팀을 지키고, 팬을 남기고, 역사를 만든 사람들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안양 링크에 남은 진짜 여운은 0-3, 2패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한계를 극복한 30년의 뜨거운 온도였습니다. 그리고 아직 올 시즌 승부도 끝난 것은 아닙니다.

김종석 채널A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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