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아름다움을 압축한 절벽 위 '다섯 개 보석 상자' [이탈리아 친퀘테레 트레킹]

김영미 여행작가 2026. 3. 30.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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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세계여행]
트레일 위에서 내려다본 베르나차 항구. 반달 모양의 포구와 절벽 위 마을이 친퀘테레의 상징적인 풍경을 보여 준다.

친퀘테레Cinque Terre(다섯 개의 땅) 트레킹 Trekking은 이탈리아 북서부 리구리아Liguria해안에 위치한 다섯 개의 절벽 마을을 잇는 해안 트레일이다. 몬테로소 알 마레Monterosso al Mare에서 리오마조레Riomaggiore까지 이어지며, 지중해를 곁에 두고 걷는 대표적인 해안 트레킹 코스로 손꼽힌다. 북쪽부터 몬테로소, 베르나차Vernazza, 코르닐리아Corniglia, 마나롤라Manarola, 리오마조레까지. 이름만 나열해도 리듬이 느껴지는 이 다섯 마을은 지중해가 오랫동안 간직해 온 보석 상자 같다. 단순한 걷는 길이 아니라, 그림엽서 속 풍경을 걷는 여정이다.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마을들은 수백 년 동안 바다를 등지고 살아온 사람들의 지혜와 끈기를 품고 있다. 바람을 피하고, 파도를 견디며, 포도밭을 일구고 길을 내왔던 시간들. 마을과 마을을 잇는 트레일을 따라 걷다 보면, 풍경뿐 아니라 이곳에서 이어져 온 삶의 흔적도 발끝으로 느낄 수 있다. 다섯 마을 전체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온 시간이 이 길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기 때문이다.

베르나차 마을 풍경. 트레일을 내려와 마주하는 마을은 늘 이렇게 붐빈다.

마을 사이로 흐르는 햇살, 그리고 바다

친퀘테레의 다섯 마을은 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트레일 위에서는 하나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절벽을 타고 흐르는 햇살과 그 아래에서 끊임없이 빛의 색을 바꾸는 바다. 길은 때로는 해안을 따라가고, 때로는 포도밭 사이로 스며들며 걷는 이를 자연스럽게 다음 마을로 이끈다. 그래서 친퀘테레 트레킹은 목적지보다 마을 사이를 걷는 시간이 더 진한 기억으로 남는다.

베르나차 항구 풍경. 반달 모양의 항구와 그 위로 층층이 올라선 집들이 인상적이다.

걷는 방향은 일반적으로 몬테로소에서 출발해 리오마조레 방향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체력적으로 조금 더 수월하다는 평이 많다. 하지만 베르나차를 향해 내려설 때 마주하는 풍경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코르닐리아에서 베르나차 방향으로 걸어도 좋다. 오르막의 수고를 감수하고서라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 길의 공식 명칭은 SVASentiero Verde Azzurro다. '초록과 푸름의 길'이라는 뜻으로, 산의 신록과 바다의 푸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전체 거리는 약 12km, 순수 걷는 시간은 5시간 정도 소요된다. 입장료는 비성수기 7.50유로, 성수기 15유로이며 구간별로 매표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친퀘테레 트레킹의 출발지, 몬테로소해변. 다섯 마을 가운데 가장 넓은 해변을 품고 있다.

나는 몬테로소에서 시작해 마나롤라까지 걸었다. 마나롤라와 리오마조레를 잇는 '사랑의 길'인 비아 델아모레는 2012년 낙석사고로 폐쇄되어 걷지 못했다. 긴 보수 작업 끝에 2024년 여름에 전 구간이 다시 개방되었고 사전 예약제로 걸을 수 있다. 언젠가 다시 이 길을 따라 리오마조레까지 완주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 전체 루트를 걸을 만큼 시간 여유가 되지 않는다면 5개의 마을 중에서 마음에 드는 1~2개의 마을만 걸어도 친퀘테레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절벽 위 첫 발걸음, 몬테로소에서 베르나차까지

다섯 마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많은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 몬테로소다. 해변과 마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이곳은 친퀘테레 트레킹의 대표적인 출발지다. 모래사장 너머로 바로 길이 시작되는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베르나차까지는 약 3.7km, 업다운이 있는 구간이라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걸린다.

몬테로소 트레일 입구에는 슬리퍼와 샌들 착용을 금지하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 이 길이 결코 가벼운 산책로가 아님을 먼저 알려 준다.

트레일 입구에서는 신발 상태를 확인했다. 슬리퍼나 샌들은 입장이 제한된다. 초반부터 돌계단이 이어지고, 숲길은 짧지만 경사가 제법 있었다. 햇빛을 가릴 그늘이 많지 않아, 편한 신발과 선크림은 필수다.

숨이 차오를 즈음 숲길이 열리고, 시야가 한순간에 트였다. 절벽 아래로 펼쳐진 몬테로소의 바다와 해변. 아래에서 보면 평온해 보이던 마을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바다와 맞서 살아온 자리라는 것이 실감났다. 업다운이 있어 쉽지 않은 산길이지만 멋진 풍경들은 힘든 발걸음에 충분한 보상을 주었다.

길은 해안을 따라 이어지고, 바다는 줄곧 오른편에서 함께 걸었다. 절벽을 끼고 걷다 보니 멀리 베르나차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 쪽으로 깊숙이 말려 들어간 항구, 색색의 집들이 층층이 포개져 있었다. 마을로 내려서는 길목에는 사랑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몬테로소에서 베르나차까지의 이 구간은 친퀘테레 트레킹의 첫 인상을 결정지었다. 오르막과 내리막, 숲과 바다,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마을의 풍경이 번갈아 나타났다.

몬테로소를 벗어나자마자 절벽을 끼고 계단이 이어진다.

해안에서 언덕으로, 베르나차에서 코르닐리아까지

베르나차는 항구와 바다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반달 모양으로 안긴 작은 항구, 그 위로 층층이 올라선 집들. 마을에 잠시 머무는 동안, 바다는 늘 가까이에 있었고 사람들은 그 곁에서 자연스럽게 일상을 이어갔다. 맑고 깊은 바닷물은 잠시라도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투명했고, 방파제와 백사장에는 한가로이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베르나차를 벗어나 코르닐리아로 향하는 길은 다시 언덕을 넘는 오르막으로 시작되었다. 약 4.1km에 이르는 이 구간은 가장 긴 구간이자 고도 변화도 큰 편이다. 항구의 소란이 점점 멀어지면서 길은 천천히 고도를 올렸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니 조금 전까지 머물던 베르나차는 점점 작아지며 바다 쪽으로 물러섰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포도밭 쪽으로 옮겨갔다. 강렬한 햇살을 먹고 자라서인지 노점에서 산 오렌지는 유난히 달았다. 잠시 쉬면서 지중해를 벗삼아 오렌지를 먹는 즐거움은 또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몬테로소와 베르나차 사이 트레일의 돌계단 구간. 친퀘테레 트레킹은 짧은 거리에도 오르내림이 잦아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포도밭과 바다 사이, 코르닐리아에서 마나롤라까지

언덕을 넘어서니 풍경이 바뀌었다. 바다와 맞닿아 있던 항구 마을 대신, 포도밭에 둘러싸인 언덕 위 마을 코르닐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친퀘테레의 다섯 마을 가운데 유일하게 항구가 없는 곳이어서인지 마을 분위기도 한결 차분했다.

포도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바다는 잠시 배경으로 물러나고 발밑의 돌길과 포도나무가 시야를 채웠다. 마나롤라까지는 약 2.7km로, 다른 구간에 비해 짧고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길은 완만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해안선을 따라 이어졌다. 시야가 트일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지중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나롤라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색색의 집들이 층층이 포개진 마을이 보였고, 길 위에도 점점 사람들이 늘어났다. 일몰 무렵이 되자, 마나롤라는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여행자들로 북적거렸다. 전망대와 언덕길에는 바다로 기울어가는 빛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조차도 풍경이 되었다. 해가 지는 황금빛 바다, 그 빛에 물든 형형색색의 마을은 조용한 감동을 전해 주었다.

절벽 위에 형형색색의 집들이 모여 있는 친퀘테레 마을 전경. 바다와 산이 맞닿은 해안 풍경이 인상적이다.

걷지 못한 길, 마나롤라에서 리오마조레까지

마나롤라와 리오마조레를 잇는 해안 산책길, 비아 델아모르Via dell'Amore는 내가 이곳을 찾았을 당시에는 폐쇄된 상태였다. 약 1.3km 남짓한 이 짧은 구간은 가장 평탄하고 낭만적인 길로 알려져 있다. 2012년 산사태 이후 오랫동안 복구공사가 이어지고 있었고, 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친퀘테레 트레킹의 가장 낭만적인 구간으로 불리는 길을 눈앞에 두고도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 여정에 또 하나의 기억을 남겼다.

마나롤라 항구 풍경. 절벽 아래 바위 위에서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

마나롤라 마을 끝에서 바라본 리오마조레 쪽 절벽은 가까워 보이면서도 쉽게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바다는 그 사이를 아무 일 없다는 듯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난간 너머로 이어질 길을 상상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걷지 못한 길은 때로, 실제 걸은 길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 나는 이 구간을 발로 잇지 못한 대신, 시선으로 천천히 따라갔다. 절벽의 선, 바다의 색, 그리고 언젠가 다시 열릴 길에 대한 기대를 담았다.

다섯 마을을 모두 발로 잇지는 못했지만, 마나롤라에서 바라본 리오마조레 쪽 절벽과 바다, 그 사이에 놓일 길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충분했다. 걷지 못한 구간이 남긴 아쉬움은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을 이유가 되어주었다.

마을마다 마련된 공용 식수대 앞에서 트레커들이 텀블러를 채우며 잠시 숨을 고른다.

마나롤라 항구에는 해질 무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색색의 집들이 저녁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바다는 잔잔한 빛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나는 항구 끝 바위에 잠시 앉아 오늘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았다. 몬테로소에서 시작해 베르나차의 항구를 지나, 코르닐리아의 포도밭을 넘어, 마나롤라까지. 바다와 절벽, 마을과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만난 풍경들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떠올랐다.

친퀘테레 트레킹에서는 혼자 걷는 사람보다 가족이 함께 걷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마나롤라로 향하는 길. 포도밭 사이로 난 트레일 옆으로 지중해가 길게 펼쳐진다.

친퀘테레 트레킹은 완주보다 걷는 과정이 더 깊게 남는 길이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 바다와 육지 사이를 오가며 만난 순간들이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Info

마을 순서

몬테로소 → 베르나차 → 코르닐리아 → 마나롤라 → 리오마조레

전체 거리

약 12km

소요 시간

하루 또는 1박2일 (순수 걷는 시간 약 5시간)

친퀘테레 카드

비성수기 7.50유로 / 성수기 15유로(기차 무제한 이용이 포함된 트레노 옵션도 있음)

식수

마을마다 공용 식수대 있음(텀블러 추천).

난이도

거리 자체는 길지 않으나 돌계단과 잦은 오르내림이 반복됨.

계절 주의

여름은 그늘이 적어 체력 소모 큼, 겨울엔 일부 구간 폐쇄.

비아 델아모르

2024년 8월부터 사전 예약제 (시간당 400명, 별도 요금 10유로)

기타

트레일 표식 양호 / 슬리퍼·샌들 착용 시 입장 제한

추천 계절

봄(4~5월), 가을(9~10월)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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