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 고시’ 없애니 ‘4세 스펙’…영어유치원이 뭐길래[점선면]
영어유치원들 “시험 대신 서류 내라”
과도한 경쟁·평가에 병드는 아이들

“경력반 같은 경우는 필수 제출 서류가 좀 있습니다. 최근 3개월 이내의 SR 스코어, 담임 선생님의 리포트, 아이가 직접 쓴 라이팅, 스피킹 영상….” (한 영어유치원 입학설명회)
영유아 사교육을 부추기는 영어유치원 등의 입학시험, 이른바 ‘4세·7세 고시’가 오는 9월부터 법으로 금지됩니다. 그런데 벌써 이 법을 우회하는 ‘변칙 고시’가 등장했습니다. 학원 자체 테스트를 하지 않는 대신, ‘서류 제출’ 명목으로 외부 기관의 평가나 자체 촬영 영상을 받는 겁니다. 주니어 토익·토플을 보라는 곳도 있고요. 너무 일찍부터 불어닥치는 사교육 광풍, 어떻게 잦아들게 할까요?
7살인데…‘학원 들어오려면 토익’
영어유치원은 이름은 유치원이지만, 법적으로는 학원입니다. 1990년대 후반 서울 강남구 일대에서 시작됐습니다. 저출생으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줄어드는 동안에도 영어유치원은 꾸준히 늘었습니다. 지난해 5월 전국에 820곳이 있고, 서울(249곳)과 경기(273곳) 등 수도권에 절반 이상이 몰려 있습니다. 비용은 월평균 154만원에 달하는데 교재비와 차량 이용료까지 더하면 1년에 3000만원 가까이 듭니다. 영유아 사교육 시장 규모는 3조3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돼요.
비싼 비용에도 영어유치원의 인기는 줄지 않습니다. 지난해 서울시교육청 설문조사를 보면,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 학부모 1만606명 중 3045명(29%)이 ‘자녀가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 다니거나 다닌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것 아닌지”하는 걱정에 영어유치원의 문을 두드립니다. 어떤 영어유치원은 그 불안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영어유치원에 1년 정도 자녀를 보낸 학부모는 주간경향 인터뷰에서 “아이의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차단하는 식의 평가를 자주 했다”며 “부모들에게 불안을 심어주려 한 것 같기도 하다”고 했어요.
영어유치원·학원에서 아이들은 경쟁과 평가를 계속 겪습니다. 보통 영어유치원은 5세반 입학이나 새학기에는 시험을 안 봐도 되지만, 중간에 등록하는 경우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일부 유명 영어유치원은 5세반 입학 때도 시험을 봅니다. 바로 ‘4세 고시’입니다. ‘7세 고시’는 초등학생 대상 어학원 입학시험을 뜻하고요.
사교육에 너무 일찍부터 내던져진 아이들은 마음의 병을 얻습니다. 2024년 1월부터 11월까지 우울증 등 정신건강의학과 관련 질환으로 의원급 의료기관을 찾은 18세 미만 아동 환자는 27만625명이었습니다. 2020년(13만3235명)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는데요. 특히 7~12세에서 증가세(남아 2.3배, 여아 2.4배)가 가팔랐습니다. 영유아 사교육 업체들이 집중된 일명 ‘강남 3구(서울 강남구·서초구·송파구)’에서는 9세 이하 우울증·불안장애 진단·치료 건수가 서울 자치구 평균(291건)의 3~5배가량에 달했습니다.
국회는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지난 12일 ‘4세·7세 고시 금지법(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초등학생보다 어린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학원은 모집이나 수준별 배정을 목적으로 시험·평가를 할 수 없도록 했죠. 이를 어기면 영업정지나 3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물어야 합니다. 유아 사교육 업계의 교습 내용에 대한 정부 차원의 첫 규제로, 오는 9월부터 시행됩니다.
문제는 앞서 말씀드렸듯 규제를 우회하는 꼼수입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지난해 10~12월 서울 주요 영어유치원 입학설명회를 찾아가봤는데요. 많은 영어유치원이 자체 입학시험을 서류 제출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영어 읽기 능력 평가인 ‘SR 테스트’ 점수나 ‘스피킹 영상’을 요구하는 식이죠. ‘7세 고시’를 보는 초등학생 대상 어학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 학원은 “현행 입학시험을 폐지한다”면서 토익이나 토플 점수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4세·7세 고시 금지법’이 실효성을 갖추려면 정부의 보다 촘촘한 후속 대책이 따라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원의 입학시험이 변형된 형태로 갈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법 조항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때때로 맞춰가면 된다”며 “교육부가 그럴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교육부는 올해부터 영유아 사교육 시장 실태조사를 시작하고 학원가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사교육 시장은 어떤 규제가 등장해도 카멜레온처럼 모습을 바꾸며 우회로를 찾아 왔습니다. 제도적 규율도 중요하지만, 과열된 입시 경쟁의 압력을 낮추는 게 본질적인 해법일 것입니다. 이윤주 경향신문 정책사회부장은 칼럼에서 “아무리 경쟁을 줄이려고 해도, 어떤 사교육 대책을 내놓아도 한국에서 대학 입시의 영향력이 약화되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일 가능성이 높다”며 “공부가 아니어도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사회 변화를 이끌어야 할 때”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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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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