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한류 팬덤 대하는 방식, 이대로는 위험하다

자카르타에 사는 인도네시아인 A씨(가명)는 케이팝 애호가다. 한때 BTS의 팬덤인 ‘아미’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케이팝 그룹의 음악을 가볍게 듣고 즐긴다. 한국 드라마도 즐겨 본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며 한국 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주변 친구들 역시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통해 위로받고 즐거움을 얻는다고 말한다. “살다 보면 종종 지치고 우울해질 때가 있는데, 케이팝을 듣거나 한국 드라마 클립을 보며 기분을 전환한다.”
그런 한편 A씨는 한국 사회가 “피부색이 어두운 사람을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느낀다. 자신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인에 대한 시선이 그렇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 그런 인식이 반영된다. 한국인 배우가 동남아계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피부 톤을 의도적으로 어둡게 표현하는 관행이 대표적이다. “현지의 다양한 맥락을 무시한 채 획일적인 색조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온라인에서 벌어졌던 한국과 동남아시아 누리꾼 간 갈등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 1월31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DAY6(데이식스) 콘서트에서 일부 한국 팬이 반입이 금지된 ‘대포 카메라(대형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로 촬영을 하다 적발됐다. 현지 팬들이 당시 영상을 SNS에 공유하며 관람 매너를 지적하자 한국 누리꾼들이 얼굴 공개가 과하다며 반발했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인의 외모를 오랑우탄에 빗대며 비하한 게시물이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동남아시아 누리꾼도 한국의 성형 문화와 높은 자살률을 들며 맞대응했다. 다른 동남아 국가 누리꾼이 가세하며 지난해 인도네시아의 반정부 시위에서 쓰였던 용어 ‘#SEAblings(동남아시아 형제자매의 약자)’가 등장했다. 동남아시아 누리꾼들 간의 디지털 연대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한국 콘텐츠를 비롯해 제품을 보이콧하겠다는 게시글이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현지 언론의 보도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을 일종의 해프닝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자카르타에 거주하는 인도네시아인 활동가 B씨는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긴 했지만 인도네시아 케이팝 팬들에게 한국 드라마와 음악은 이미 일상이라 실제 보이콧으로 이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팬 커뮤니티 내의 열띤 논쟁’으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신호’를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도네시아에 20여 년째 거주하고 있는 재외국민 김정호씨는 “작은 해프닝일 수 있으나 신호가 좋지 않은 만큼 한국 사회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오피니언 리더가 즐겨 읽는 현지 주요 일간지(〈콤파스〉)에서 이런 이슈가 반복적으로 다뤄진다는 점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김씨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K콘텐츠가 아직까지는 긍정적 인상을 갖고 있지만, 과연 지속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다. “문화는 상호 교류가 기본인데 한국은 스스로를 일방적인 ‘제공자’로만 인식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눈에 띄었다. 동남아시아 역시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만큼, 한국이 이에 대해 충분한 관심과 존중을 보여왔는지 되묻는 목소리였다.”
누적되어 온 감정의 분출
베트남 하노이 국립대학 외국어대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응우옌티하 씨는 이번 논란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연대로 빠르게 확산된 배경에 주목했다. 단일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간 누적되어온 감정적 요인이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본다. “일부 동남아시아인들 사이에선 한국 사회가 인종적 우월감을 갖고 있고 자국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성’이라는 요인이 더해지면 갈등은 매우 빠르게 증폭된다.” 베트남의 경우 논란이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관련 유튜브 영상(10만~15만 조회수)에 댓글이 1000개 이상 달리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반한(反韓) 정서와 한국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비교적 뚜렷하게 관찰된다”는 점이다.

한국이 K콘텐츠를 소비하는 해외 팬덤, 그중에서도 동남아시아를 대하는 태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다. 모에스토포 대학(자카르타) 국제관계학과의 아리스 헤루 우토모 교수는 지난 몇 년간 온라인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패턴이 이번에도 되풀이됐다고 분석했다. “동남아시아 팬들은 글로벌 문화 공동체의 동등한 참여자라기보다 주로 케이팝 앨범·굿즈·콘서트 티켓의 구매자로 묘사된다. 팬덤의 경제적 기여는 인정받지만, 문화적 존재감은 과소평가되고 있다.” 이 가운데 동남아시아 국가에 대한 고정관념이 담긴 발언이 무심코 나오며, 현지 팬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타이·베트남·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는 K콘텐츠 선호도와 소비 경험을 묻는 조사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한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해외 28개 지역 한국 문화 콘텐츠 경험자 2만6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년 해외 한류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콘텐츠의 월평균 소비 시간이 필리핀(24시간), 타이(20.1시간), 아랍에미리트(19.2시간)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평균 14시간). 한국 콘텐츠에 대한 호감도 역시 필리핀(88.9%), 인도네시아(86.5%), 인도(84.5%), 타이(82.7%) 등에서 높았다(평균은 70.3%). 한류가 한국 제품이나 서비스 이용에 영향을 미친다는 응답에는 인도네시아(82.7%), 필리핀(81.6%), 인도(79.5%), 베트남(76.3%)이 전체 평균(63.8%)을 크게 웃돌았다.
이처럼 한류의 주요 수용지인 동남아시아에 관해 한국인들은 의외로 잘 알지 못한다. ‘아시아 한류’를 말할 때도 주로 중국과 일본에 집중했고 동남아시아는 가까운 관광지, 혹은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주민의 출신지 정도로 인식해왔다.
동남아시아가 한류 시장으로 부상한 시기는 1990년대 말부터다. 그즈음 베트남에서 드라마 〈느낌〉 〈첫사랑〉 〈의가형제〉 등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2000년대 중반 〈풀하우스〉 〈대장금〉의 인기가 동남아에서 한류 확산을 이끌었다. 중심축은 금세 케이팝으로 이동했다. 넷플릭스 등 OTT의 확산으로 한국 드라마와 예능의 접근이 수월해지면서 동남아시아는 한류의 핵심 소비지로 부상했다. 한류 연구자들은 동남아시아가 다양한 민족과 언어, 종교가 공존하는 지역이라 외국 대중문화 수용에 비교적 개방적이라고 분석한다. 이러한 환경은 한류가 빠르게 확산되는 토양이 됐다.
동남아시아는 그중에서도 특히 케이팝 수요가 집중된 지역이다. 음악 데이터 분석 플랫폼 ‘차트메트릭’의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 케이팝 청취 비중의 약 18.5%를 차지하는 1위 국가다. 필리핀(9%), 타이(6.8%), 말레이시아(3.7%) 등도 상위권에 포진해 있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는 한류의 관점에서 아시아는 언제나 압도적으로 큰 시장이었다고 말한다. “2010년대 후반 BTS와 블랙핑크가 영미권에서 인기를 얻으며 시장이 다변화됐지만, 동남아는 여전히 한류의 핵심 거점이다.”
2024년 기준 동남아시아 11개국 인구는 약 7억명에 이른다. 젊은 층 비중이 높고, 세계적으로도 소셜미디어 이용이 활발한 지역으로 꼽힌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일어나는 케이팝 스트리밍·투표·댓글 등 팬덤 활동의 참여도 역시 높은 편이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같은 국가는 글로벌 음악 트렌드를 가늠하는 지표로도 주목받고 있다. 김윤하 평론가는 “스포티파이를 비롯한 서구권 음악 플랫폼과 커뮤니티에서도 아시아 시장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인구 평균 연령대가 낮은 국가들에 대한 성장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케이팝 팬덤이 확산되며 갈등도 잦아졌다. A씨는 2024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골든디스크어워즈(GDA)에서 이번과 유사한 충돌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팬사이트 측이 더 좋은 사진을 찍으려다 다른 관객을 밀치는 등 소란이 있었다. 시야를 확보하려고 사다리까지 가져온 것으로 안다.” 팬사이트는 특정 연예인이나 아이돌 팬이 운영하는 비공식 커뮤니티로, 운영자(이른바 ‘홈마’)가 공연·행사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과 영상, 굿즈 등을 국내외 팬들에게 판매하기도 한다. 팬덤 활성화에 기여하는 면이 있지만, 과도한 촬영 경쟁과 상업화 및 사생활 침해 논란을 낳는 등 부정적 영향도 적지 않다.
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인 C씨는 케이팝의 오랜 팬이다. 미얀마에 있을 때 BTS를 처음 접한 뒤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세에 한국에 건너온 지 어느덧 11년이 지났다. 그동안 BTS를 비롯한 한국 가수들의 콘서트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3월21일 광화문 BTS 컴백 콘서트 티케팅에도 성공한 그는 콘서트에 갈 때마다 다양한 국적의 팬들을 본다. 외국인과 한국인 팬덤 사이에서 긴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굿즈를 살 때 외국인들이 여러 명을 대신해 한꺼번에 많이 구매하기도 한다. 그럴 때 한국 팬들이 주변에 다 들리도록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식이다.”
그는 동남아시아 팬덤과 한국 팬덤 사이의 인식 차이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순한 문화 차이가 아니라, 외국인을 대하는 차별적 태도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날 때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개인의 경험에만 그치지 않는다. K콘텐츠 내에서도 비슷한 시선이 포착된다. 2021년 방영된 드라마 〈라켓소년단〉은 인도네시아 현지 숙소 환경과 응원 문화를 왜곡하는 장면을 내보내 논란을 빚었다. 항의가 이어지자 결국 제작진이 사과했다. 이듬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극 중 인물을 영웅으로 묘사한 〈작은 아씨들〉이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단되기도 했다.
이번 한국-동남아시아 누리꾼 간 설전을 계기로 과거 인종차별 사례들도 다시 주목받았다. 인도네시아 일간지 〈콤파스〉는 2024년 한인 온라인 커뮤니티 ‘인도사랑’에서 한국인이 현지인의 종교·외모·문화를 비하하는 글을 올려 여론의 반발을 샀던 일과 타이 출신 블랙핑크 멤버 리사를 둘러싼 차별 논란을 함께 언급했다. 현지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비롯된 사례도 재조명됐다. 2023년 블랙핑크 콘서트 주최사가 베트남 공연을 앞두고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반영된 남중국해 지도를 웹사이트에 게시해 보이콧 논란이 일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소비자 넘어 능동적 행위자”

동남아시아 현지에선 K콘텐츠의 인기가 여전한데도 불구하고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대중의 소비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토모 교수는 “한류 초창기에는 한국 콘텐츠가 별다른 비판 없이 수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날 동남아시아 관객들은 좀 더 성숙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한국 콘텐츠를 즐기면서도 표현의 적절성, 글로벌 팬덤 문화 안에서의 상호 존중, 그리고 한국과 해외 관객 간의 관계 균형 같은 문제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시장의 여건도 전과 같지 않다. 베트남 음악 시장을 예로 들면, 가장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분야가 자국의 음악인 V팝이고 그다음이 미국 팝, 케이팝 순이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여러 국가의 음악이 유입되고 있는 데다, 베트남 아티스트의 음악 역시 글로벌 수준에 근접해가고 있다. 응우옌 씨는 “선택지가 훨씬 많아졌기 때문에 케이팝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라고 말했다. 인기가 하락했다기보다 경쟁 환경이 훨씬 복잡해졌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팬들의 결속력과 충성도가 높게 유지된다는 점이 케이팝 팬덤의 강점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김정호씨는 한류라는 용어가 어떤 면에서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동남아시아의 외교·경제 파트너로서, 한국은 교역 규모에 비해 존재감이 크지 않다. 오히려 식민 지배의 경험이 있음에도 일본에 대한 선호도가 더 높게 나타난다. K컬처의 인기가 소프트 파워로까지 충분히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류의 확산으로 이러한 격차가 가려지며 일종의 착시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2024년 인도네시아의 싱크탱크 FPCI가 아세안 회원국을 대상으로 미국·일본·중국·한국 등 9개 국가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가장 신뢰할 만한 파트너’ 순위 8위에 머물렀다.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 즉 ‘문화 리터러시’가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응우옌 씨는 특히 ‘로컬 감수성’을 강조한다. “베트남에서 지도 표기나 전통 의상처럼 역사·영토·문화를 상징하는 요소들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정체성과 직결된 ‘상징 자본’이다. 이러한 부분을 가볍게 다룰 경우 팬들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 만든 콘텐츠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현지에서 제작 일부를 담당하는 ‘현지화 전략’도 대안으로 언급된다. 무엇보다 팬덤을 파트너로 보는, 인식 전환이 필수적이다. “동남아 팬들은 이미 단순한 소비자를 넘어 콘텐츠 확산과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주는 능동적 행위자다.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순간, 단순 논란을 넘어 (한국이라는) 브랜드 리스크로 확대될 수 있다.”
얼마 전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2관왕을 차지했다. 이 작품의 성공은 한류가 더 이상 한국이라는 국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최근 몇 년, K콘텐츠는 세계를 무대로 전례없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계속해서 따라붙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도 번번이 비켜갔다. 이런 성취와 별개로, 종종 크고 작은 잡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완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는 “한국 문화의 영향력이 크게 달라졌지만, 그에 걸맞은 감각과 태도의 적응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 세계시민으로서의 감각이 아쉽다”라고 말했다. 문화산업은 결국 ‘좋아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 마음이 오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국경을 넘어선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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