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뾰족집에 찾아온 고손녀…97년 전 집으로 돌아온 후손들
관사 이면에 숨겨진 '신앙·교류' 서사 확인…다층적 역사 가치 주목
"보존은 시대적 정산 과정"…2029년 건립 100주년 공동 만남 약속

광복 80년을 지나며 지역사회가 식민지기의 유산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됐다.
지난 29일 대전 원도심 골목에 위치한 '대흥동 뾰족집(국가등록문화유산 제377호)'에는 1929년 이 집을 짓고 살았던 일본인 와타나베 이와지(渡邊岩治)의 후손 10명이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증손주부터 고손녀까지 4-5대에 걸친 일가가 가족 단위로 참여한 첫 사례다.
이는 10여 년 전 증손녀 미즈노 가요코 씨가 과거 주소 하나에 의지해 대전을 찾았던 개인적 추적이 계기가 됐으며, 이후 대전시의 도움으로 가문과 대전의 연결고리가 복원되며 성사됐다.

가요코 씨는 "집이 아직 남아 있고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증조할머니(하루코)는 평소에도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셨다"며 "대전에서의 삶을 평범한 고향의 기억으로 이야기하셨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뾰족집은 '철도국장 관사'라는 단편적인 사실 탓에 일제 수탈의 상징적 공간으로만 박제돼 왔다. 그러나 학계의 조사와 후손들의 기록은 이 공간이 가진 또 다른 실체를 증언한다.
이토 마사히코 우송정보대 교수는 이 집이 단순한 관사가 아니라 대전 거주 일본인 신자들의 안식처이자 민간 교류의 구심점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실제로 뾰족집은 일본식 다다미방과 더불어 당시 일본 가옥에서 보기 드문 서양식 거실(리빙룸)을 별도로 갖추고 있는데, 이는 사적 거주를 넘어 공동체 형성을 위한 장소였음을 방증한다.
공간 곳곳에는 개인의 삶과 가족적 비극이 교차하는 서사도 깊게 스며있다.

1933년 16세에 사망한 둘째 딸 야스코의 신앙적 유언은 이 집이 담고 있는 인간적인 고통과 위안을 보여준다. 야스코는 3개월 넘게 지속된 고열 속에서도 간병하는 이들에게 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으며 ,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곳까지 왔지만 신께서 좋게 해주실 것"이라며 오히려 부모를 위로했다.
와타나베 가문의 이러한 평화적 신앙은 시대에 대한 정직한 성찰로 이어졌다. 국가나 이념보다 신앙적 양심을 우선시했던 이들의 태도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광기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와타나베 이와지의 셋째딸 하루코 씨는 1989년 쇼와 천황 사망 당시 자신의 일기장에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를 말했던 사람들 모두가 참으로 어리석었다"고 적으며 전쟁의 비참함을 비판했다.
현재까지도 이들 가문은 매년 모임을 통해 가족의 기록을 정리하고 공유하며 자신들의 역사를 스스로 복원해가는 중이다.

방문단 중 가장 어린 고손녀, 초등학교 6학년 미즈노 마이코 양의 존재는 이번 방문에 각별한 의미를 더했다.
고조할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뾰족집과 대전여자중학교 강당(현 대전갤러리)을 차례로 둘러본 마이코 양의 발걸음은 조상의 삶터이자 수탈의 역사가 상존했던 대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는 미래의 씨앗이 됐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공간을 둘러싼 논의가 단순한 보존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박경목 충남대 교수는 "과거의 흔적을 무조건 없애기보다 보존을 통해 시대적 교훈으로 삼는 '정산(精算)'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밝혔으며, 이상희 목원대 교수 또한 "좋고 나쁨의 흔적을 함께 품어야만 다음 세대에게 온전한 역사를 이야기해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뾰족집을 보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낡은 건물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 잠재된 서사와 평화의 가능성을 지켜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날 일정을 마무리하며 후손들과 대전시 관계자들은 하나의 약속을 나눴다. 뾰족집이 지어진 지 100년이 되는 3년 뒤, 다시 이곳에 모여 각자의 기록을 나누고 이 공간의 의미를 이어가자는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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