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여자… 렘피카의 '처절한 생존기'
뮤지컬 '렘피카' 한국 초연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살면서 목숨보다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나요. 난 두 사람 있었어요. 그것도 동시에."
뮤지컬 '렘피카'는 한 여자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퀴어와 치정극의 형식을 띠지만, 보편적인 사랑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작품은 사랑과 자유, 예술 그리고 그 이전의 생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품은 '아르데코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폴란드 출신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의 삶을 그려낸다. 기하학적으로 날카로운 선과 기계적인 질감을 주는 매끈한 표면, 관능적인 육체 묘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의 그림을 단번에 구별하게 한다.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렘피카는 러시아 혁명으로 삶이 전복된다. 폴란드 귀족 남편은 감금되고, 렘피카는 하루아침에 생존의 벼랑에 몰리게 된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남편을 구하고 결국 파리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리던 중 파리의 창부 라파엘라를 만난다.
도덕과 윤리, 예의와 규범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거친 생명력을 지닌 라파엘라는 렘피카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한다. 라파엘라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긴장감 있게 표현한 '스틸니스(Stillness)'는 그저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에로틱하고 로맨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화폭과 모델에 번갈아 시선을 두는 렘피카는 매혹된 라파엘라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내려는 듯 집중한다. 관능적인 포즈를 취한 모델 라파엘라는 낯설고 묘한 부끄러움 속에서도 보통의 화가와는 다른 열정을 지닌 렘피카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렘피카와 라파엘라는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를 넘어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최고의 감정을 눈빛으로 주고받는다.
이 장면은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연출되지 않았다. 오리지널 연출가인 레이첼 채브킨이 한국 배우들과 연습하는 과정에서 렘피카와 라파엘라의 관계를 세밀하게 구축하기 위해 오프브로드웨이 공연 이후 삭제됐던 장면을 되살린 것이다.
불꽃 튀기듯 격돌하는 두 여성 보컬

작품은 강렬한 여성 서사를 구축한다. 생계를 위해 남편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하던 렘피카는 여성 화가에 대한 편견을 이겨내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그림에 새긴다. 술집 여급 수지는 자신들만의 카페를 열며 주체적인 삶으로 나아간다. 렘피카의 대사대로 "남자들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이제 제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그 선두에 여전사처럼 선 렘피카는 순종적인 아내로 돌아오길 바라며 고향으로 돌아가자던 남편에게 "혼자 떠나"도 아닌 "너도 떠나지 말고 나랑 함께 있어"라고 말한다. 남성 캐릭터들에게서 종종 들었던 이기적인 말들이 여성의 대사로 전유되는 쾌감이 있다.
여성 서사는 음악에도 내장돼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렘피카 역을 맡은 에덴은 작곡가 맷 굴드의 음악이 "엘파바(뮤지컬 '위키드'의 초록 마녀)와 에비타가 아기를 낳는 것 같다”며 소화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여성 투톱 뮤지컬은 엘파바와 글린다,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처럼 날것의 고음과 부드러운 클래식 발성의 조화를 이루기 마련이다. 그러나 '렘피카'의 음악은 엘파바와 엘파바, 엘사와 엘사가 만난 것처럼 음악이 불꽃을 튀기듯 격돌한다.
실제 그동안 국내 역대 엘파바 역을 맡았던 박혜나, 김선영(이상 렘피카 역), 차지연, 손승연(이상 라파엘라 역)이 총출동한다. 여기에 가창력이라면 빠지지 않는 정선아(렘피카 역)와 린아(라파엘라 역)가 합류하며 화려한 트리플 캐스팅을 완성했다.
뮤지컬 ‘그레이트 코맷’과 ‘하데스타운’을 통해 자신만의 미학을 보여준 오리지널 연출가 채브킨은 국내 배우들과의 협업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더욱 깊이 있게 구축하는 섬세한 연출을 구현했다. 무대는 렘피카 그림의 특징인 아르데코 양식을 차용해 규칙적인 직선과 곡선을 통한 심플하면서도 모던한 공간을 구축했다. 렘피카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추상적이고 원색을 살린 생명력 넘치는 의상은 강렬한 비주얼로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테크노풍의 강렬한 오프닝 곡부터 재즈와 팝을 넘나드는 과감한 음악은 이전의 뮤지컬 음악 어법을 벗어난다. 새로운 시대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뮤지컬 '렘피카'는 6월 21일까지 코엑스아티움에서 공연한다.

객원기자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3,000만 원 드론으로 미국 상대하는 이란...드론 전쟁 시대, 한국군은 어디쯤 왔나-정치ㅣ한국일보
- "대통령이 방송 조지면 나라 꼴 뭐가 되냐"... SNL 출연 한동훈, 李에 쓴소리-정치ㅣ한국일보
- 이휘재, 눈물로 복귀 심경 토로… 쌍둥이 아들 언급하며 오열-문화ㅣ한국일보
- 오염된 채 방치된 유해에 또 무너졌다... 무안공항 못 떠나는 유족들-사회ㅣ한국일보
- 부모님이 내 가게 직원이 됐다... 연희동 핫플 만든 '동료 가족' 이야기-문화ㅣ한국일보
- 올해 사표 낸 검사 벌써 ' 58명'... 검찰청 폐지 앞두고 줄줄이 이탈-사회ㅣ한국일보
- "야, 또 터진다"... 韓대사관, 매일 새벽 폭음 속에서도 이란서 버티는 이유-정치ㅣ한국일보
- 도끼·이하이, 생일에 전격 열애 발표?... 동료 축하까지 "결혼 가자"-문화ㅣ한국일보
- [단독] 배우 이상보 사망… 현재 경찰 수사 중-문화ㅣ한국일보
- 유해진의 비밀 연습실은 어디? '타짜 고광렬' 탄생시킨 파주의 한 둑방-문화ㅣ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