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프라 허브’ 떠오른 대만… ‘부품 공급자’ 머무른 한국

정원석 선임기자 2026. 3. 29.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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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석의 매크로 리뷰] 인공지능(AI)이 바꾼 동북아 경제 지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2025년 5월 19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5 기조연설에서 대만에 설립할 엔비디아 해외 본부 사옥 조감도를 공개했다. /사진 엔비디아

인공지능(AI) 기술 확산으로 글로벌 산업 질서가 재편하면서 한국과 대만의 경제적 연결성도 빠르게 강화되고 있다. 2025년 한국의 대(對)대만 수출액은 490억7009만달러(약 73조5560억원)로 전년보다 150억달러(약 22조4850억원) 이상 늘었다. 특정 국가 수출이 1년 만에 40% 이상 증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 결과 대만은 홍콩을 제치고 중국·미국·베트남에 이어 한국의 4대 수출 시장으로 부상했다.

한국의 대만 수입도 빠르게 늘고 있다. 2025년 수입액은 323억2443만달러(약 48조4543억원)로 전년 대비 7% 증가했다. 대만은 중국·미국·일본에 이어 한국의 4대 수입국이 됐다.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철광석을 공급하는 호주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앞지른 것이다. 한국의 대대만 무역수지는 2024년 사상 처음 흑자로 전환한 데 이어 2025년에는 역대 최대인 158억4566만달러(약 23조7526억원) 흑자를 기록했다.

대만이 한국의 주요 교역 대상으로 부상한 것은 AI 반도체 중심의 새로운 산업 분업 구조가 자리한 덕분이다. 세계경제에 AI 열풍을 일으킨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요 폭증이 한·대만 반도체 교역 확대를 이끈 것이다. H100·H200·블랙웰(B200) 등 엔비디아 AI 연산용 GPU는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매개로 미국·대만·한국이 참여하는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생산된다. 미국 엔비디아가 설계한 칩을 대만 TSMC가 파운드리(수탁 생산)로 만들고, SK하이닉스가 납품한 HBM이 첨단 패키징 공정을 통해 결합해 하나의 AI 반도체가 완성된다. 이 과정에서 한·대만 반도체 부품 교역이 빠르게 늘어나는 구조다.

AI 공급망 중심으로 떠오른 대만

이런 분업 구조로 대만은 글로벌 AI 산업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 대만은 집적회로(IC) 설계부터 반도체 생산, 패키징, 테스트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공급망을 갖추고 있다. 전 세계 전자제조서비스(EMS) 매출 약 70%를 차지하는 대만 기업이 AI 서버 생산을 주도한다. 예컨대 엔비디아 GPU는 TSMC가 첨단 공정으로 생산하고, 이후 CoWoS로 불리는 첨단 패키징 공정에서 HBM과 결합한다. GPU와 HBM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 이 공정을 사실상 TSMC가 독점하고 있으며, AI 반도체 생산의 핵심 병목(bottleneck)으로 꼽힌다. 이렇게 생산한 GPU는 폭스콘, 위스트론, 콴타 등 대만 서버 제조사(ODM)가 제작하는 서버에 탑재돼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등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에 공급된다. 구글의 AI 모델 ‘제미나이’를 구동하는 텐서처리장치(TPU)도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서버에 탑재된다. 업계는 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첨단 반도체 90% 이상이 대만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공급망 구조 속에서 글로벌 빅테크의 AI 인프라가 대만에 모여든다. 대만 언론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타이베이시(臺北市) 정부와 지난 2월 스린·베이터우 과학단지(臺北士林北投科技園區)에 들어설 해외 본사 부지 계약을 체결했다. 약 400억대만달러(약 1조8000억원)가 투자되는데, 거대 슈퍼컴퓨터 등 AI 연구개발(R&D)센터가 들어선다.

구글도 2025년 11월 인근 스린구(區)에 세계 최대 규모 AI 인프라 하드웨어 엔지니어 센터를 열었다. 이 밖에도 MS, IBM, 아마존 등이 타이베이에 데이터센터 등을 구축하고 있다.

2025년 11월 20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구글의 신규 AI 인프라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센터 개소식에서 라이칭더(왼쪽 세 번째) 대만 총통, 아메르 마흐무드(왼쪽 네 번째) 구글 클라우드 플랫폼 인프라 엔지니어링 부사장 등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로이터연합

반도체 생산 기지에서 AI 인프라 국가로

AI 인프라가 하이테크 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대만은 단순한 반도체 생산 기지를 넘어 글로벌 AI 인프라 허브로 부상하고 있다. 그 배경엔 대만 정부의 정책 지원이 있다. 대만 정부는 반도체·AI·고성능컴퓨팅(HPC) 등 전략산업에 세제 혜택과 R&D 보조금을 주고, 인재 양성과 전력·토지·용수 등을 패키지로 지원해 민간투자 확대를 유도하고 있다. TSMC 본사가 있는 신주(新竹)뿐 아니라 타이난(臺南)·가오슝(高雄)·타이중(臺中)·짜이(嘉義)·핑둥(屏東)을 연결하는 ‘반도체 S 자 벨트’를 구축해 대만 내 생산 기지를 둔 기업이 글로벌 수요에 맞춰 생산능력을 유연하게 확충하도록 돕는다. 이는 SK하이닉스가 조성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부지·용수·전력 확보 문제로 지연을 겪은한국 상황과 대비된다.

대만은 중국 경제 약진으로 경쟁력이 약화하자, 2010년대 중반부터 AI를 차세대 핵심 성장 동력으로 삼는 전략을 추진했다. 2017년부터 ‘AI 타이완 액션 플랜’을 통해 AI 연산 인프라 구축과 공공 데이터 개방, AI 컴퓨팅센터 설립 등을 추진했다. ‘타이와니아(Tai-wania)’ AI 슈퍼컴퓨터 시리즈는 기후 예측, 바이오 연구, 산업 설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2024년 출범한 라이칭더(賴清德) 정부는 ‘AI 아일랜드’를 목표로 1900억대만달러(약 8조8600억원)를 투자해 전국 단위 AI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엣지 컴퓨팅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단기 목표는 2028년까지 글로벌 메가 데이터센터 10개 이상 유치다. 장기적으로는 ‘10대 AI 인프라 프로젝트’를 통해 2040년까지 15조대만달러(약 692조원) 이상의 경제 가치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처럼 민간 기업 중심의 공급망과 정부 산업 정책이 결합하면서 대만은 글로벌 AI 인프라 허브 역할을 하는 ‘기술형 성장 국가’ 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Plus Point
병목 거머쥔 한국, 플랫폼 장악한 대만</spn>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2025년 5월 19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5 기조연설에서 대만에 설립할 엔비디아 해외 본부 사옥 조감도를 공개했다. /사진 엔비디아


“AI 메모리, LNG선, 초고압 전력 장비, 방산(방위산업). 이 네 산업은 모두 기술 장벽이 높고 공급자가 제한된 분야다. 한국은 지금 세계 산업의 핵심 병목을 거머쥔 독보적인 나라가 됐다.”
김용범(사진) 청와대 정책실장이 최근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글의 한 대목이다. 그는 “대한민국 주식회사(Korea Inc.)는 지금 저평가를 벗겨내는 과정에 있다”며 최근 코스피 급등을 둘러싼 과열 논란을 반박했다. 그러나 이 같은 ‘병목 국가론’은 글로벌 공급망의 실제 구조를 단순화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병목을 쥐고 있다는 사실이 곧 산업을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AI 반도체 산업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은 HBM에서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공급망 주도권은 쥐지 못하고 있다. HBM3E에서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품질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납품이 지연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메모리를 제외한 로직 칩, 첨단 패키징, 설계 생태계 등 AI 반도체 핵심 영역은 미국 빅테크와 대만 TSMC가 장악하고 있다. TSMC는 제조사 너머 고객·설계·패키징을 묶는 ‘조정자’ 역할을 한다. 결국 한국은 핵심 부품 공급자일 뿐, 플랫폼 지배자는 아니다. 이 차이는 거시 경제 성적표에서도 드러난다. 2025년 한국은 대만과 교역에서 158억달러 이상 흑자를 기록했지만,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0%에 그쳤다. 반면 대만은 8.7% 성장했다. 같은 공급망에 속해 있어도, 한국에서 만든 HBM이 대만에서 AI 반도체로 완성돼 미국으로 수출되면서 발생한 부가가치는 플랫폼을 쥔 쪽에 축적된다.
다만 엔비디아 GTC 2026에서 공개된 언어처리장치(LPU) ‘그록(Groq) 3’를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생산하는 것은 공급망 내 위상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이번 수주를 AI 플랫폼 지배력 강화 기회로 확장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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