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다시 재밌어져”…서로 일으켜 세운 두 락커 [유재영의 전국깐부자랑]

유재영 기자 2026. 3. 2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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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닮음 아닌 다름으로 서로를 키우고 살린 가수 김장훈-김종서의 우정

깐부. ‘같은 편’, 나아가 ‘어떤 경우라도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의미의 은어(속어)죠. 제아무리 모두 갖춘 인생이라도 건전하게 교감하는 평생의 벗이 없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좋은 인간관계는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깐부들 사이에 피어나는 ‘같이의 가치’를 소개합니다.

“혼자인 게 좋아~.”

그런데 요즘은 혼자가 아니다. 노래 가사였지만 김종서는 정말 혼자가 편한 사람이다. 미성으로 열정을 토해 내는 록가수이지만, 스스로를 ‘극(極)내향인’이라고 부를 정도다. 무대 밖에선 혼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의 노래처럼 ‘아름다운 구속’을 좋아한다.

김장훈은 정반대다. 사람 좋아하고, 사람 사이를 누비며 에너지를 만든다. 그렇다고 아무나 어울리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겪어 본 다음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차라리 혼자가 낫다고 여긴다. 대신 한두 명이라도 맞는 사람이 있으면 그건 축복이라 믿는다. 그 사람에게는 자신을 아낌없이 쏟는다.

성향만 보면 쉽게 가까워질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있다. 전화하고, 공연 얘기를 나누고, 무대를 함께 구상한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같이 가 보려 한다.

김종서는 무대 밖으로 나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는 타입이다. 반면 김장훈은 세상 바쁘다. 남 잘 챙기고, 세상 돌아가는 이슈에도 밝다. ‘척하면 삼천리’다. 얘기를 즐긴다. 방송에서 자기 노래를 안 틀어도 괜찮지만 토크가 없으면 서운하다. 이런 두 사람이 묘하게 맞물린다.

“나를 다시 일으켜준 사람, 장훈 씨 감사해.” 김종서(왼쪽)는 김장훈(오른쪽)을 알게 해 준 세상에 감사하다. 김장훈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김종서는 없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12일 만난 두 사람은 몇 시간이고 웃음과 진지함을 넘나들었다. 한 사람이 길게 이야기를 풀면, 다른 한 사람이 짧게 끼어들어 맞장구와 농담을 얹는다. 한 사람은 밥상을 잘 차리고, 다른 한 사람은 숟가락을 기막히게 얹는다.

단순히 친한 형, 동생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관계다. 김종서에게 김장훈은 무대와 세상으로 자신을 다시 끌어낸 사람이다. 김장훈에게 김종서는 가수로서의 재미를 다시 알게 해 준 사람이다. 상상의 설계를 가능하게 해 준 사람이다.

● 같은 시대, 다른 궤적

이때는 지금처럼 음악 얘기하면서 친하게 지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김장훈(위 사진)과 김종서의 데뷔 시절. KBS 유튜브 캡처

둘 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김종서는 1987년 록그룹 시나위로 데뷔해, 1992년부터 솔로로 ‘대답 없는 너’ ‘아름다운 구속’ 등을 부르며 록 보컬의 상징이 됐다. 김장훈은 긴 무명 생활을 거쳐 1991년 데뷔했다. 이후 다시 긴 공백기를 거치며 공연형 가수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둘 다 록커 계보다. 그런데 의외로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종서 씨, 우리 오래 안 친했어.”
“맞아요. 동선이 안 맞았어.”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궤적이 달랐다. 김종서가 록의 중심에서 확고한 보컬리스트로 자리 잡을 때, 김장훈은 방향을 찾고 있었다.

“종서 씨가 한창 록을 할 때, 난 노래할 거라는 생각도 못 했어. DJ 하면서 소리만 지르던 시절이었지. 고등학교에서 짤리고 12년을 연습만 했어. 그리고 스물아홉 살 때 데뷔했지. 비교하면 김종서는 록의 신이고, 나는 어중간한 신이에요.”

농담처럼 들리지만, 긴 시간 버텨낸 사람의 자조가 묻어난다.

둘이 오래 전 스쳐가긴 했다. 조금 보다가 말았다.

“1993, 94년쯤이었지? 종서 씨 사무실에 갔어. 그날 차로 데려다 주기까지 했잖아. 그때 속으로 엄청 부러웠어.”(김장훈)

“그땐 내가 나이도 속였잖아. 1968년생으로. 가까이하기엔 서로 애매했지.”(김종서)
“장훈 씨 나이를 알고 있었어요. 이승환이가 장훈 씨를 형이라고 부르더라고”

진짜 관계는 훨씬 뒤늦게 시작됐다.

● “노래해 줄게” 한마디로 시작됐다

뜻밖의 장면이 있다. 5~6년 전이다. 김종서가 LP바(bar)를 운영하던 시기. 방송에서 오랜만에 김종서를 만난 김장훈이 작정하고 그곳을 찾았다. 인사치레인 줄 알았던 “놀러 갈게요”라는 약속을 바로 지켰다. 둘 사이의 ‘온도’가 확 올라갔다.

“손님이 없으니까 장훈씨가 밖에서 호객 행위를 하더라고요. ‘내가 노래해 줄게!’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붙잡더니 진짜 모시고 들어오는 거예요.”(김종서)
“손님 데리고 와서 ‘종서 씨, 반주 틀어’라고 했잖아. 나도 자숙한다고 사람들 안 만나던 시기였어. 종서 씨도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잘해 주지?’라고 생각했을 걸.”(김장훈)
“감동이었죠. 장훈 씨가 자기 밴드까지 데려와서 노래해 주고…. 낭만적이었어.”

● “전설을 그냥 둘 순 없었다”

김장훈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레전드인데 나보다 더 힘들게 지내면 안 되겠더라고.”(김장훈)

그의 과거 경험이 발동한 것이다. 바로 움직였다.
“전인권 형이 어려웠을 때 내가 수발을 들었거든. 그 마음이 뭔지는 몰라. 인권이 형을 잘 알지도 못했을 때였어.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한 우상이었잖아. 그런 형님이 힘들어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더라고. ‘내가 여유가 되니 도울 수 있겠다’고 했어. 종서 씨한테도 같았어.”

설명이 더 필요 없었다. 감정이 먼저였다. 계산은 없었다. 김종서는 그때 생각을 바꿨다.
“그런 장훈 씨를 보고 사람은 사귀어 봐야 안다는 걸 확신했어요. 김장훈은 오해로 진면목이 많이 가려진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더라고요.”

둘은 ‘형’ ‘동생’ 대신 ‘~씨’로 부른다. 나이보다 존중을 택했다.
“종서 씨가 형이라고 부르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내가 이정재와 정우성처럼 서로 존대하면서 지내자고 했지. 존칭을 쓰면 서로 적당한 긴장과 예의를 유지할 수 있잖아. 난 이 결정이 너무 좋았어.”(김장훈)

둘은 오래가는 관계의 선을 영리하게 잡았다.

● 자멸한 그를 무대로 끌어내다

김종서는 한동안 무대를 떠나 있었다.
“완전히 폭망한 적이 있었어요.”

10여 년 전이었다. 몇 번 공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충격이 컸다. 무대가 두려워졌다.
“내가 명색이 김종서인데…. 기고만장했는데 바로 트라우마가 되더라고요. 그때부터 나는 ‘공연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크지 않은 무대에서 간혹 노래했지만 “열과 성을 다할 수 없었다”고 했다. 슬럼프가 달아나지 않았다. 그런데 4년 전 언젠가 김장훈이 대뜸 물었다.
“왜 공연 안 해? 공연 만들어 줄게.”

그리고 진짜 만들어 줬다. 2022년 김종서의 윤당아트홀 공연. 기획만 한 것이 아니라 사진전까지 더했다. 윤당아트홀 옆 갤러리에 김종서의 사진 실력까지 활용했다.

“사진 사 줄 사람까지 종서 씨 한테 데려왔잖아. 꽤 팔았어.”(김장훈)
단순한 도움이 아니었다. 김종서 재건 작업이었다. ‘공연의 신’답게 공연과 전시와 팬을 한꺼번에 엮어 냈다.

“200석 공연 세 번. 그다음 600석 해 보고, 1000석으로 가는 거지. 이렇게 공연해 보고 방송하면 가수의 기가 살아.”

김종서를 살리는 일에서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감각이었다. 무대, 관객, 박수, 매진. 그 감각을 다시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자존심을 복구해 주면서 김종서를 세상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김종서는 처음에는 ‘이 사람 뭐지?’ 싶었다. 그러다 김장훈에게 온전히 ‘나’를 맡겼다.
“장훈 씨가 큰 숲을 잘 보더라고요.”

자기 영역을 쉽게 내주지 않는 예술가가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상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인정했다. 내가 갖지 못한 걸 가진 김장훈을.

● 확장 관계…“우리끼린 초라해하지 말자”

이렇게 보면 서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종서는 내 안의 열정을 끄집어내 줘.” “겪어 보니 김장훈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많이 가졌어.”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김장훈도 김종서를 만나 변했다.
“나이 환갑에 종서 씨한테 성악 발성을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고집 강하던 독학파가 소리 내는 루틴까지 바꿨다. 원래는 무대 올라가기 전에 고음을 몇 시간씩 질렀다. 목이 쉬어 무대에 올라가기 일쑤. 그래도 버텼다. 그러다 김종서에게 힘을 빼는 법, 말하듯 노래하는 법, 고음을 쥐어짜지 않고 내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몸이 바로 반응한다.

“지금은 공연 전에 힘을 빼요. 소리를 안 지르고 무대에서 놀 수 있게 됐어요. 호흡도 길어지고. 종서 씨에게 제일 감사한 건… 노래가 다시 재밌어졌다는 거예요.”

“장훈 씨도 저 만나서 많이 변했어요. 원래 외식을 잘 안 하던 사람이 저한테 ‘서서갈비’를 배웠어요.” “진짜 서서 먹는 줄 알았다니까. 다리 아파서 혼났어.” 별것도 아닌 일이 둘의 ‘긍정 회로’에선 전부 추억으로 변한다. 유재영 elegant@donga.com

“제가 김장훈을 가르쳤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아는 선에서 어드바이스만 했어요. 진짜 장훈 씨처럼 노래를 파고드는 사람을 못 봤어요. 음색도 독보적인데다, 날 것의 느낌이 확 나요. 가수로서 전성기가 아닌가 싶어요.”
“별말씀을. 종서 씨는 정말 방부제 성대를 갖고 있어.”

김종서에게 자신의 목소리는 ‘꽤나 아픈 손가락’이었다.

“인후염 때문에 방송에서 노래를 몇 번 망쳤어요. ‘김종서 목소리 완전히 갔다’는 소문이 퍼지더라고요. 유명 가수들이 서로 경쟁하는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저를 안 불렀어요.”

이렇다 저렇다 해명할 수도 없고 “저, 목소리 멀쩡해요. 아직 잘해요”라고 말하는 순간 정말 자신이 초라해질 것 같았다.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었다.

“노력하고 버텨 보자 마음을 먹으니까 진짜 제 목소리가 불안해졌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스스로 개선하거나 조절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발성을 바꾸기로 하고 성악 전공 정상영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처음엔 성악을 배우는 게 와닿지 않았죠. 터널 초입에 있는 것 같아 끝이 안 보였어요. ‘나 죽었습니다’ 하고 6개월, 1년을 버티니 소리의 길이 보이더라고요.”

새 발성을 배우고 거기에 다시 자기 색을 입히는 것. 김장훈은 “정말 존경스럽다”고 했다.
“다시 새로운 고음을 낼 수 있게 된 건 가수 중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요.”

김종서는 최근 리메이크 싱글을 발표했다.
“누군지는 말 못하지만 대부분 가수들이 나이가 들면 원곡을 할 때 키를 내려서 부르잖아요. 그런데 종서 씨는 28년 전 노래 ‘에필로그’를 다시 원키(원래 키)로 불렀어요.”(김장훈)
1998년 곡이다.

“그때 제가 방송국에 갔는데 주변에서 저를 누구랑 비교하더라고요. ‘김종서 큰일 났네. 대항마가 나왔네’ 하면서요.”
김경호였다. 그의 노래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공전의 히트를 치던 때였다. 곁에서 김장훈이 “언젠가 그가 너를 맘 아프게~”라고 흥얼거린다.

“경호 인기가 올라가니까 소속사에서 김종서도 신곡을 만들어 보자고 한 거죠. 이거 뭐, 차력 대결도 아니고. 그래서 냈어요. ‘김경호 때려잡기 프로젝트’ 곡이죠.”(김종서)
“에필로그가 정말 부르기 어려운 노래거든요. 음이 얼마나 높은지 노래가 유언장 같았다니까. 성악 발성으로 목소리를 다시 찾은 종서 씨한테 제가 아이디어를 던진 거죠. 신곡 내는 것보다 에필로그를 다시 끄집어 내자. 28년 전 팔팔하던 김종서와 지금의 김종서가 대결하는 이슈를 만들자고 했죠.”(김장훈)
둘의 관계는 확장하고 있다.

● ‘발칙한 미래’를 그리는 우리

“종서 씨, 내가 대저택을 사면 월세 안 받고 방 하나 줄게. 같이 있자.”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 정도 되면 좋지. 난 자연이 좋아요. 집 주변에서 새가 울어야 돼.” 발칙한 상상에 둘은 오늘도 웃는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우정에는 보통 추억이 많이 쌓여 있다. 그런데 둘의 우정엔 과거보다 같이 할 미래가 더 많다. 와이어 공연, 듀엣, 페스티벌, 새로운 무대….

“장훈 씨 목표가 뭔지 아세요? 저를 와이어에 매달리게 하는 거랍니다.”(김종서)
“김종서랑 이소라를 크레인에 한 번 태우는 게 죽기 전 소원이에요. 조명이 꺼지고 김종서가 크레인에서 ‘마이 러브, 부디 나를 잊어줘’라고 부르면…. 상상만 해도 행복해요.”(김장훈)
김종서가 크게 웃는다.

“될 거예요.”
김장훈이 말한다.
“규모보다 중요한 건 과정 같아.”
잠실주경기장 공연도 매진시켜 봤다. 그렇지만 대학로에서 어렵게 공연을 시작해 잠실주경기장까지 가게 된 과정이 더 보람 있고 기뻤다.
“그 10년이 더 재밌었어요.”

멋진 수사보다 반복되는 동행에 의미를 둔다. 같이가 주는 가치를 요즘 실감한다. 김종서는 “장훈 씨를 알고 시너지라는 걸 처음 느꼈다. 뭘 하더라도 긍정적인 기대감이 생기고 동반 상승하는 기운을 느낀다”고 했다. 웬만하면 김장훈의 위성으로 주변부에 있으려 한다. 김장훈 행사면 무조건 간다. 행사 현장에서 밥을 먹다가도 김장훈이 부르면 음식이 입에 들어 있어도 노래를 부른다. 본래의 김종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상천외하면서도 발칙한 상상이 둘의 동행에 재미를 더한다.

“종서 씨가 노래 잘 하고 히트곡도 많은데 잔잔하게 웃길 줄도 알아요. 이런 면이 유기적으로 잘 묶여 있어요. 김종서만 생각하면 별 아이디어가 다 나와요.”

진짜 계속 나온다.
“종서 씨하고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수와 진’ 선배들처럼 듀엣하는 거예요. ‘락 앤 락’, 좋잖아요. 록큰롤 할 때 락(rock)이랑 즐거울 락(樂)으로. 밀폐용기 브랜드 ‘락O락’ 회사에 아는 사람 있어요? 협찬 받으려고. 하하.”

혼자였다면 허황되게 들렸을 법하다.
둘의 우정은 미담보다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실천으로 채워져 있다. 현실적인 배려가 많다. 김종서는 올해 20회 정도 공연을 하고 싶다. 김장훈이 김종서의 부산, 광주 공연을 성사시켰다.

둘은 “크게 바라는 건 없다”고 한다. 다만 알고 있다. 힘들 때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옆에 서 있을 것이라고.

“종서 씨, 성시경이가 주변 사람들한테 이런 얘기를 했대. 장훈이 형을 만나려면 내가 어려워져야 된다고. 자기가 잘 나갈 때는 연락이 안 되고, 힘들어지면 ‘어떻게 지내냐’고 연락이 온다는 거야.”(김장훈)

“그래서 난 장훈 씨가 잘 안 되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하하.”

김장훈은 김종서가 다시 혼자 ‘아름다운 재구속’에 빠질 일 없다고 자신한다. 그렇게 둘은 오늘도 서로를 살린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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