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에트나의 테네브리즘, 피에트라돌체 [전형민의 와인프릭]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6. 3. 2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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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그림 ‘다윗과 골리앗의 머리’를 마주하면 조여오는듯한 기괴한 서늘함이 먼저 덮쳐옵니다. 소년 다윗이 거머쥔 채 뚝뚝 피를 흘리는 골리앗의 잘린 머리, 그 참혹한 얼굴은 다름 아닌 카라바조 본인의 자화상이죠.

이 그림이 관람객의 목을 조르는 이유는 단지 잘린 머리라는 잔혹한 소재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그 끔찍한 형상을 화면 밖으로 밀어 올리는 완벽한 어둠 때문이죠. 미술사에서는 격렬한 명암 대조로 피사체를 부각하는 이 기법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 부릅니다.

흔히 말하는 명암법,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가 사물의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빛과 그림자를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조율한다면 테네브리즘의 방식은 폭력적입니다. 배경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소멸시키고, 오직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피사체에만 극단적인 스포트라이트를 꽂아 넣는 식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머리. 카라바조作.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온화한 묘사 대신 충돌과 긴장을 통해 피사체를 부각시키는 방식 속에서, 어둠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화면을 지배하는 거대한 실체가 되고 빛은 그 어둠을 예리하게 찢고 나오는 사건이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와인의 세계에도 정확히 이 테네브리즘의 문법을 따르는 결과물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와인 업계에서 습관처럼 쓰이는 ‘부드럽다’ ‘우아하다’ ‘밸런스가 좋다’ 등 수사는 키아로스쿠로에 가깝습니다. 모난 곳 없이 둥글고 친절한 와인에게 부여되는 안전하고 타협적인 단어들이죠. 하지만 진짜 압도적인 와인 앞에서는 이러한 느슨한 단어들이 가장 먼저 의미를 잃습니다.

감상적인 위로 대신 미각에서부터 명확하게 충돌하며 서늘함을 요구하는 와인.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의 부티크 생산자, 피에트라돌체(Pietradolce)가 바로 그 극단적인 테네브리즘의 캔버스라고 부를만 합니다.

활화산의 해발 900m에서 척박한 화산재와 검은 현무암이라는 완벽한 ‘어둠’을 깔고, 100년 넘게 뿌리를 박고 자라온 고목이 지층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서리 같은 산미를 ‘빛’처럼 투사하기 때문입니다.

시칠리아의 활화산인 에트나산. 에트나 화산은 지금도 정상에서 지속적으로 연기와 가스가 분출되고 있는 활화산이다. [사진=pietradolce.com]
네렐로 마스칼레제, 앞으로 익숙해질 이름
피에트라돌체를 처음 듣는다면 이름 때문에 부드럽고 달콤함을 연상케 합니다. 이름에 포함된 돌체(Dolce)가 후식의 달콤함이나 부드러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와인은 마냥 부드럽지 않습니다. 잔 속에서 와인은 용암 재질의 거친 검은 돌(Pietra)이 주는 서늘함과 짠기가 혓속 미뢰를 타격하고, 그 압력을 견뎌낸 뒤에야 비로소 부드러움이 의미를 얻습니다.

앞서 테네브리즘 화풍에서 검은 배경이 짙어질수록 빛이 예리해지듯, 화산의 척박함이 깊어질수록 와인의 선명한 산도는 더 잔혹하리만치 또렷해지는 셈입니다. 와인을 입에 머금고 감상을 즐기기도 전에 모든 방향에서 조여오는 산미와 구조감이 ‘왜 이 와인이 좋다는 수준을 넘어 ‘정확하다’는 인상을 주는지’를 드러냅니다. 마치 카라바조의 ‘다윗과 골리앗의 머리’처럼요.

흔히 에트나 와인을 두고 ‘지중해의 부르고뉴’라 부릅니다.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라는 시칠리아의 토착 품종의 캐릭터가 부르고뉴 피노 누아 품종의 캐릭터와 흡사하다고 느끼는 것인데요. 마케팅 관점에서라면, 전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하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활용하는 것은 일견 영리해보입니다. 하지만 떼루아를 분석하는 입장에서는 지독히 게으른 수사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수확을 앞둔 네렐로 마스칼레제 품종 포도. [사진=pietradolce.com]
네렐로 마스칼레제에서 피노 누아의 투명감과 네비올로의 구조감을 느껴질 수는 있지만, 향의 결은 훨씬 더 화산적이고 염분감이 강합니다. 석회질 언덕(부르고뉴)이 아니라, 펄펄 끓던 용암이 차갑게 식어 굳은 현무암과 화산재의 땅(시칠리아)에서 피어났기 때문입니다.

북부 이탈리아 알토 아디제의 화이트 와인에서 느껴지는 쨍하고 투명한 미네랄리티 대신 희뿌연 스모키함과 짭짤함이 가미된, 비에 젖은 재를 핥는 듯한 서늘한 이 감각을 피에트라돌체는 ‘블랙 미네랄리티’라고 소개합니다.

마치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애초 검은 게 아니었을까 싶은 검은 캔버스(블랙 미네랄) 위를 하얀 선(산도)이 예리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기형적이고도 매혹적인 변주. 이것이 피에트라돌체의 네렐로 마스칼레제가 보여주는 미각적 테네브리즘이 아닐까요.

*다음 주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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