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딸’ 셰익스피어 아내…길들여지지 않는 생명력 [.txt]

우리는 종종 눈부신 예술은 천재의 자율적인 손끝에서 탄생한다고 믿어버린다. 특히 셰익스피어 같은 이름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클로이 자오의 ‘햄넷’은 이 익숙한 신화로부터 시선을 돌려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 ‘위대함’은 누구의 삶 위에서 가능했는가.
윌(폴 메스컬)과 아녜스(제시 버클리)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 곧 가정을 꾸린다. 그러나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폭력과 가장으로서의 책무라는 압박 속에서 윌이 점차 시들어 갔기 때문이다. 아녜스는 남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를 런던으로 보낸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그렇게 세상 속으로 한발 내디딘다.
‘햄넷’은 셰익스피어가 창작에 매진할 수 있도록 다른 모든 것을 돌보았던 아녜스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고, 역사에서 공백으로 남겨져 있는 그의 삶을 복원한다. 이는 단순한 ‘재조명’이라기보단 예술(art)의 재정의에 가깝다. 삶을 유지하고 이어 나가는 기술들, 낳고, 먹이고, 살리고, 감각하는 역능을 삶의 기예(art)로 다루는 것이다.
실비아 페데리치가 ‘캘리번과 마녀’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활동 시기는 근대 초창기였다. 유럽 제국은 안으론 다양한 역능을 지닌 여성들을 마녀로 낙인찍어 성적 질서를 재편했고, 밖으로는 다른 대륙의 선주민들을 야만으로 규정해 토지와 자원, 노동력을 수탈했다. 마녀사냥과 인종화는 하나의 메커니즘의 두개의 얼굴이었다.
이런 시기와 맞물려 무어인(‘오셀로’), 유대인(‘베니스의 상인’), 남반구 선주민(‘템페스트’) 등이 인종주의의 무대 위에 올려졌고, “말괄량이는 길들여져야” 했다. 셰익스피어의 유려한 언어가 펼쳐졌던 무대는 제국주의적 세계관이 문화적으로 정당화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아녜스의 아트는 이와는 다른 자리에 놓인다. 그의 삶은 착취적인 문명에 길들여진 ‘돌봄노동’으로 단순히 수렴되지 않는다. 그건 따뜻하고, 말랑말랑하며, 순종적인 어떤 ‘여성적 자질’이 아니다. 그것은 거칠고, 난폭하며, 때로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힘이다.
“마녀의 딸”로 불리는 아녜스는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승된 지혜를 갖춘 사람이다. 그는 허버리아(약초를 다루는 여자)이자 픽시드리아(연고 상자를 든 여자)였다. 실제로 당시 이런 이름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은 위험한 마법을 부리는 자들로 분류되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
아녜스의 기예는 숲과 연결되어 있다. 세계를 만나고, 배우는 장소로서의 숲, 아니 세계 그 자체인 숲은 스크린 위에 숭고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숲을 떠날 수 없다. 숲과의 연결을 잃는 순간 그를 존재하게 하는 감각의 회로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아녜스가 스트랫퍼드에 머무는 이유다.
물론 셰익스피어를 그저 제국주의의 부역자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템페스트’의 선주민 캘리번과 마녀 시코락스는 그저 침묵하는 존재가 아니며, 유럽인들이 ‘검은 대륙’에 대해 품고 있었던 두려움과 경이가 새어나오는 균열이기도 했다. 이런 분열적인 세계 인식은 (영화를 경유해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아녜스의 숲과 윌의 무대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공간인 스트랫퍼드가 윌에게 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윌의 세계와 아녜스의 세계는 스트랫퍼드 안에서 함께 엉겨 있었다. 이것이 두개의 세계로 고통스럽게 쪼개지는 것은 아들 햄넷의 죽음 이후다. 아녜스가 질서로의 회복을 꿈꾸는 애도를 거부하고 비언어적 혼돈 속으로 무너져 내릴 때, 윌은 자신의 고통에 언어적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렇게 햄넷을 애도하는 비극 ‘햄릿’이 탄생한다.
아녜스는 ‘햄릿’을 보기 위해 처음으로 남편의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을 찾는다. 그리고 극의 초반, 무대를 향해 절규한다. “도대체 내 아들의 이름을 한 저자가 내 아들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윌이 구사하는 예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수사(rhetoric)의 기예를 받아들이게 된다. 아, 이것은 산 아버지와 죽은 아들이 죽은 아버지와 산 아들의 형상으로 다시 만나는 이야기구나. 이것이 저 비정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방식이구나. 아녜스가 무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은 언어의 예술이 일상의 예술 앞에서 삶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승인받는 순간이다.

‘햄넷’이 여성을 문명과 대비되는 신비로운 자연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새롭지 않다. 모성을 다시 자연화하는 서사로 읽힐 위험 역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그 고전적인 틀을 넘어선다고 생각한 이유는 ‘동굴’ 때문이었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대체의 순간을 아녜스의 신체를 통해 경험하도록 유도하는데, 결정적인 몇몇의 장면에서 우리를 윌의 주관성의 자리로 이동시킨다. 아녜스가 숲에서 ‘동물처럼’ 출산한 직후 스치는 동굴의 이미지는 그중 하나다. 우리는 윌의 시점에서 ‘원초적 자궁’으로서 동굴과 아주 짧은 시간 마주한다. 이 장면을 사로잡는 분위기는 아무래도 기괴함이다.
그 장면을 통해 나는 우리가 더 이상 동굴이 암시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모성과 생명력을 아녜스와 같은 방식으로 만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클로이 자오는 그 지워진 역능을 어떻게든 스크린 위에 재현해 보려고 분투했고, 실패의 순간을 동굴의 이미지로 고백했다.

그리하여 나는 영화 속 아녜스의 시간을 모성에 대한 진부한 재현으로 치부하지 않기로 했다. 또 다른 돌봄의 가능성에 대해 꿈꾸는 것이 제국주의적 침탈이 다시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여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기예일 것 같아서다.
손희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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