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평가 탈출일까, 주주가치 희석일까…SK하이닉스, 미국 상장 시동
최대 15조 조달, HBM 투자 실탄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기대
주주환원 방안 병행 여부가 관건

일본 토요타, 중국 알리바바, 대만 TSMC, 덴마크 노보노디스크 등 각국 간판 기업인 이들은 본국 증시와 미국 증시에서 함께 거래된다. 해외 투자자 접근성을 높이는 통로인 미국 주식예탁증서(ADR)를 통해서다.
SK하이닉스 역시 ADR 방식으로 올해 미국 증시 상장을 추진한다. 상장이 현실화할 경우 주가 재평가를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글로벌 펀드 자금을 흡수해 주가를 떠받치고 실탄을 마련해 투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기대만큼 따져봐야 할 변수도 적지 않다. 실제 자금조달 효과가 얼마나 될지, 기존 주주가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1. 그동안 미국에서 하이닉스 못 샀나?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는 올해 들어 SK하이닉스 주식 매수 방법을 문의하는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미국 개인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에 투자할 수 있는 경로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로빈후드 등 현지 증권 앱에서는 한국 상장주식을 거래할 수 없어 투자를 원한다면 한국 금융회사에 직접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
2023년 외국인 사전등록제 폐지로 절차는 간소화됐지만 환전과 결제 체계, 세금 구조의 차이로 인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상 현지에 상장된 한국 ETF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ADR은 한국 투자자들이 국내 증권 앱으로 미국 주식을 쉽게 거래하듯, 국내 상장 주식을 미국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증서다. 기존 주주에게 별도로 배정되는 구조는 아니지만 미국 투자자들이 달러로 매매할 수 있어 사실상 미국 상장에 준하는 효과를 낸다.
2. 마이크론보다 잘 버는데 왜 더 싸게 평가받나?

SK하이닉스는 지난 3월 24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ADR 상장을 위한 등록서류를 비공개로 제출했다고 밝혔다. 연내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공모 규모와 방식, 일정 등 세부 조건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업계는 SK하이닉스가 이번 ADR 상장을 위해 신주를 발행, 약 10조~15조원 규모 자금을 조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2월 자사주 2.1%를 소각하면서 활용할 수 있는 자사주가 없는 상황에서 신주 발행이 사실상 유일한 조달 수단이기 때문이다. 확보 자금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에 투입될 예정이다.
SK하이닉스가 ADR 상장을 검토하는 이유는 경쟁사 대비 저평가 상태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컨센서스 기준 2026년 예상 자기자본이익률(ROE)은 SK하이닉스가 71.0%로 마이크론(65.1%)보다 높지만 주가순자산비율(PBR)은 SK하이닉스가 2.9배로 마이크론(3.9배)보다 낮다.
이는 SK하이닉스가 수익성 측면에서는 마이크론에 앞서고도 시장에서는 오히려 더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시장에서는 실적과 수익성 대비 한국 반도체 기업의 저평가가 뚜렷한 만큼 이를 보다 직관적으로 해소할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3. ADR, 주가 재평가 확실한가?
TSMC는 1997년 10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ADR을 상장했다. ADR 상장은 대만 증시에 상장된 본주 주가 상승을 견인하는 계기가 됐다.
뉴욕증시에서 글로벌 투자자들은 TSMC 기업가치를 현지 동종 기업과 비교했고 대만 TSMC 본주보다 ADR이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TSMC 사례처럼 SK하이닉스도 자사주를 ADR로 상장하면 즉각적인 재평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 견해다.
김영건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SK하이닉스 ADR 상장은 기존 마이크론 등 일부 종목에 집중됐던 글로벌 메모리 투자 수요를 분산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양사 간 밸류에이션 격차를 줄이려는 흐름, 즉 ‘키맞추기’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 목표를 ‘2000조원’으로 제시한 바 있다.
미국 현지 롱펀드나 패시브(지수 추종) 펀드 자금이 유입돼 주가를 끌어올릴 가능성도 있다.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SOX) 등 글로벌 지수에 포함될 가능성이 거론되기 때문이다.
지수 편입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실제 수급 변화를 동반할 수 있다. 최근 국내 투자자들이 대거 매수한 디렉시온 데일리 반도체 3배 레버리지 ETF(SOXL) 역시 SOX 지수 움직임을 기초로 한다.
미국 주요 반도체 ETF 포트폴리오만 봐도 SK하이닉스의 공백은 선명하다. 반에크 반도체 ETF(SMH)에선 TSMC ADR 비중이 11.4%, 마이크론은 6.5%에 달하지만 SK하이닉스는 빠져 있다. 아이셰어즈 반도체 ETF(SOXX)에서도 비중은 0%다.
4. 삼성전자는 왜 미국 상장 안 하나?
ADR 상장의 장점은 뚜렷하다. 큰 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쉽게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까다로운 SEC 공시기준을 충족하지 않아도 되고 상장 절차를 단순화할 수 있어 그동안 해외 기업들이 미국 자본시장에 진입할 때 가장 현실적인 통로로 활용돼 왔다.
하지만 미국 시장 상장이 무조건 호재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증시에 상장하면 미국 증권거래법 적용을 받는 만큼 기업 입장에선 새로운 부담도 함께 커질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소송 리스크다. 미국 시장에 들어가는 순간 집단소송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회사 내부 이메일이나 회의록, 개발 관련 문서까지 제출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반도체 기업 특유의 기술 정보가 외부로 노출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만약 SK하이닉스가 소송에 휘말릴 경우 회사 내부 이메일, 회의록, 개발 문서 등을 미국 법원에 제출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이 과정에서 반도체 핵심 기술 유출 우려가 부각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상장 이후에는 미·중 갈등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가 지금보다 더 직접적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리스크도 있다.
5. 신주 발행, 기존 주주가치는?

국내 투자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리스크는 기존 주주의 주식 가치가 희석될 가능성이다. 한국거버넌스포럼은 신주를 발행할 경우 기존 주주의 지분이 희석돼 손해를 본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포럼 측은 “SK하이닉스가 2026~2028년 동안 189조원의 설비 투자와 수십조원의 연구개발(R&D) 투자를 집행한 이후에도 약 672조원의 잉여현금흐름이 창출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10조~15조원 규모의 ADR 상장을 통한 신규 자금이 왜 필요한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주총에서도 ‘SK하이닉스의 주주환원 정책이 부실하다’는 주주들의 지적이 빗발쳤다. 한 주주는 “자사주를 사서 ADR을 상장하라”고 요구했다.
전문가들은 SK하이닉스가 상장 방식 자체보다 이를 계기로 주주 환원과 주주가치 제고를 얼마나 구체화하느냐에 따라 주가 향방이 달렸다고 말한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대다수 투자자들은 ‘ADR 발행’이라는 나무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주주가치 제고라는 목적”이라며 “향후 신주 발행 방식의 ADR이 실제로 추진된다면 주당 가치 희석이 불가피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자사주 매입·소각이나 대규모 배당 등 주주환원 방안이 함께 제시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주가는 회사가 벌어들인 이익을 얼마나 주주가치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다. 김 애널리스트는 “앞으로 금융시장의 최대 관심사는 SK하이닉스의 영업가치가 실제로 주주가치로 얼마나 이전되느냐가 될 것”이라며 “ADR 발행 과정에서 주주환원 계획과 세부 조건이 구체화될수록 주가 재평가 가능성도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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