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세상을 지키는 자 ‘메인테이너’

2026. 3. 28.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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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의 역사는 기술 발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산업혁명 후 전기 통신 비행기 원자폭탄 컴퓨터 인터넷 등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신기술이 쏟아졌고 이 기술을 선점한 기업, 그 기업을 가진 국가가 각 산업의 패권을 가져갔다.

과학 기술사를 연구하는 두 저자는 사회의 관심이 혁신가, 기업가에 쏠려 있지만 실제 사람들의 생활과 안전에 더 많이 기여하는 건 그 기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유지보수 노동자(maintainer·메인테이너)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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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빈셀·앤드루 러셀 '지탱하는 힘'
2016년 5월 30일 서울 광진구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시민들이 정비 작업 중 사고로 숨진 김군을 추모하고 있다. '지탱하는 힘'의 저자와 한국어 번역자들은 사람들의 생활과 안전에 더 많이 기여하는 건 기술 혁신가가 아니라, 그 기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유지보수 노동자, 메인테이너(maintainer)라고 지적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패권의 역사는 기술 발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산업혁명 후 전기 통신 비행기 원자폭탄 컴퓨터 인터넷 등 기존에 경험하지 못한 신기술이 쏟아졌고 이 기술을 선점한 기업, 그 기업을 가진 국가가 각 산업의 패권을 가져갔다. 자본과 노동, 단 두 개의 변수만으로는 당시의 폭발적 경제 성장을 설명할 수 없었던 학자들이 ‘기술 혁신’이란 마법의 단어를 발견하면서, 혁신은 사회에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조지프 슘페터(1883~1950)가 말한 창조적 파괴(기술 혁신을 통해 낡은 것을 버리고 변혁을 일으키는 과정)는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됐다.

과학 기술사를 연구하는 두 저자는 사회의 관심이 혁신가, 기업가에 쏠려 있지만 실제 사람들의 생활과 안전에 더 많이 기여하는 건 그 기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유지보수 노동자(maintainer·메인테이너)라고 지적한다. “실리콘밸리에 좋은 일이 우리에게도 좋다거나 혁신 계급이 생각하는 바가 우리에게도 좋다"는 말에 넌더리가 났던 저자들은 10여 년 전부터 세상을 제대로 굴러가게 만드는 메인테이너를 꾸준히 소개했고, 이 개념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미 언론이 사회 필수 노동자에 주목하면서 각광받았다. 한국의 기술사를 연구하는 옮긴이들은 이 책의 해제에서 메인테이너의 국내 사례로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군, 충남 태안 화력발전소의 석탄 컨베이어 벨트를 점검하던 김용균씨를 꼽았다.

‘혁신 망상(The Innovation Delusion)’에 사로잡힌 독자들을 위해, 책은 혁신의 정의를 분명히 한다. 제대로 된 혁신은 ‘수익을 발생시키는 계량 가능한 변화’다. 애플은 아이폰으로 인류의 통신 방법을 바꿨고, 천문학적인 이익을 내며 한때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에 올랐다.

문제는 기업이 내놓은 신기술 상당수가 ‘혁신 언어(language of innovation)’, 즉 과대광고로 끝난다는 것. 2003년 피 한 방울로 각종 질병을 알 수 있다고 사기 친 기업 테라노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기술과 시설의 유지보수에는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고 비용이 들지만, 생색은 나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투자되긴 쉽지 않다. 저자들은 미국의 인프라 분야 공공 지출이 1960년 국내총생산(GDP)의 3.6%에서 1985년 2.6%로 떨어졌다고 짚는다.

아무리 혁신을 강조하고 실제 혁신이 이뤄지더라도 처음의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긴 어렵다. 1967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모란디 다리가 개통됐을 때 언론은 “별도의 유지보수가 필요 없다”며 혁신 기술을 자랑했지만, 실제 25년간 다리 보수를 하지 않은 결과 2018년 붕괴 사고로 43명의 사망자를 냈다.

저자들은 혁신 망상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을 바꿀까’보다 '무엇을 지킬 건가'를 먼저 질문하라고 조언한다. 유지보수는 공짜가 아니라는 점도 명심하라고 덧붙인다. 기술을 운용하고, 관리하고, 보수하는 메인테이너를 사회가 제대로 대접해야 예기치 못한 사고와 복구에 드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이다.

지탱하는 힘·리 빈셀, 앤드루 러셀 지음·박서현 유상운 최형섭 옮김·이음 발행·304쪽·2만8,000원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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