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할 신뢰, 법정추인의 규범적 재해석

최근 부동산 분양 분쟁을 다루다 보면 '법정추인'이라는 제도가 실무에서 반복적으로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급심 판례 역시 잔금 지급이라는 외형적 이행이 존재하는 경우 취소권이 소멸되었다고 판단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모든 외형적 이행이 곧바로 법정추인으로 귀결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전제가 되는 신뢰가 과연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당한 신뢰인지는 규범적으로 한 번 더 차분히 점검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하에서는 실무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고민을 바탕으로, 법정추인의 해석과 적용에 관하여 조심스럽게 문제를 제기해 보고자 한다.
Ⅰ. 법정추인은 '조문 대입'이 아니라 '규범적 가치평가'의 문제이다
민법 제145조의 법정추인은 취소권자의 명시적 의사표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취소권을 소멸시키는 강한 법적 효과를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그 요건 해석은 문언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해당 권리를 소멸시키는 것이 과연 정의와 형평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판단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법정추인은 단순히 일정한 사실관계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제도라기보다는, 그 사실을 근거로 형성권을 박탈하는 것이 정당한지를 묻는 가치평가의 영역에 가깝다. 이러한 제도의 성격을 고려할 때, 요건 충족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는 보다 신중한 해석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결국 법정추인의 인정 여부는 단순한 사실의 존재만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라, 그 사실을 근거로 취소권을 박탈하는 것이 규범적으로 정당한지에 대한 법원의 판단 구조 속에서 검토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Ⅱ. '사실의 인지'와 '권리 선택' 사이의 간극
실무에서 자주 문제 되는 장면은 수분양자가 사전점검이나 입주 준비 과정에서 기둥과 같은 구조적 요소를 실제로 확인한 이후 잔금을 지급한 경우다. 이때 상대방은 이를 두고 하자를 알고도 계약을 이행한 것이라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물리적 사실을 목격하였다는 점과, 그 사실이 분양계약의 취소 사유에 해당하여 취소권이 발생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는 것은 구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러한 인식의 간극이 사업주체의 선행적인 정보 제공 부족이나 고지 미흡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를 곧바로 수분양자의 자기책임으로 귀속시키기에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현실적으로 수분양자는 잔금 기일을 앞두고 연체이자, 계약상 불이익, 입주 지연 등의 압박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충분한 법률적 검토를 거쳐 권리 행사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 역시 실무에서 자주 확인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선 계약상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 선택을 곧바로 계약 유지를 전제로 한 확정적 의사표시로 평가하는 데에는 일정한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부 판례에서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단지 수분양자들이 잔금을 지급하였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법정추인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부산지방법원 2023. 3. 9. 선고 2022가단334315 판결, 부산고등법원[창원] 2023. 11. 9. 선고 2022나10517 판결 등 참조).
Ⅲ. 외형적 이행과 객관적 판단 가능성
법정추인의 판단에서 보다 중요하게 살펴볼 부분은, 외형적 이행이 이루어진 시점에 당사자가 그 행위의 의미와 효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었는지 여부다.
분양 당시 충분히 제공되었어야 할 정보가 누락된 상태에서 완공된 실물을 처음 마주하는 상황에서는, 수분양자가 정보의 공백 속에서 급박한 결정을 요구받게 된다. 이처럼 사업주체의 정보 제공 방식으로 인해 수분양자의 숙려 기간과 판단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제한되었다면, 그러한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이행을 곧바로 권리 포기로 평가하는 것은 외형과 내심 사이의 괴리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Ⅳ. 거래의 안전은 '정당한 신뢰' 위에서만 유지된다
법정추인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흔히 언급되는 것이 '거래의 안전'이다. 이미 이행이 이루어진 계약관계를 쉽게 뒤집지 않음으로써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본고의 제안이 법정추인 제도 자체의 근간을 흔들거나 자기책임의 원칙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래의 안전이 보호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당한 신뢰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사업주체가 신의칙상 고지의무를 위반하여 수분양자의 판단 기회를 실질적으로 박탈한 특수한 상황에서까지, 그로 인해 형성된 이행의 외형을 기초로 자신의 이익을 확정하고자 하는 신뢰를 동일하게 보호하여야 하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정보 제공이 충분히 이루어져 상대방이 그 의미와 효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던 경우와, 그러하지 못한 경우는 구별하여 볼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해석이 오히려 시장 전반의 정직성과 거래 안전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Ⅴ. 객관적 주의의무와 신뢰 보호의 한계
전문성을 갖춘 사업주체에게는 일반 수분양자보다 높은 수준의 객관적 주의의무가 요구된다. 이는 거래의 본질적 결정 요소에 관하여 충분하고 명확한 정보가 제공되었는지에 관한 문제로서, 주관적으로 고지를 다하였다고 인식하였는지 여부와는 구별하여 검토될 필요가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고지의무의 대상이 되는 사정이 존재하고, 그 정보의 제공 여부에 따라 상대방의 판단 가능성이 실질적으로 제한되었다면, 이후 형성된 외형만을 근거로 신뢰 보호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선행적 주의의무가 충분히 이행되었는지에 대한 검토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Ⅵ. 실무에서의 잔금 지급과 최소한의 대응
실무에서 분양계약 당시 알지 못했던 하자 등으로 인하여 분양계약 취소 또는 해제 관련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잔금을 지급했는데 괜찮은가요?"라는 질문을 적지 않게 접하게 된다. 많은 수분양자들이 연체이자나 계약상 불이익에 대한 우려로 충분한 검토 없이 우선 잔금을 지급한 뒤, 뒤늦게 법률 상담을 받게 되는 경우다.
실무적으로는 잔금 지급 시 이의를 보류한다는 의사를 내용증명 등의 방식으로 남겨 두는 것이 보다 신중한 절차가 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조치가 없었다 하더라도, 잔금 지급 전후로 하자 보수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거나 문제를 제기한 정황이 존재한다면, 그 이행을 곧바로 무조건적인 추인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른 유보적 이행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을 것이다. 이미 잔금이 지급되었다는 사정만으로 모든 다툼의 가능성이 소멸된다고 단정하기보다는, 당시의 정보 제공 상태와 판단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Ⅶ. 맺으며 — 법은 지켜야 할 신뢰를 지킨다
법은 모든 기대를 보호하지 않는다. 법이 보호하는 것은 지켜야 할 신뢰이다.
기존 판례의 엄격한 흐름은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구조적 정보 비대칭 속에서 수분양자의 판단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제한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 결과 보호되는 신뢰가 과연 객관적 주의의무를 전제로 형성된 것인지는 계속하여 성찰될 필요가 있다.
지켜져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지켜져야 할 신뢰가 무엇인지를 끝까지 고민하고 기록하는 일, 그것이 법이 법조인에게 요구하는 기본적인 신뢰의 자격 중 하나라고 믿는다.
박사훈 대표변호사(법률사무소 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