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콘서트서 커피 팔래요”… 바리스타로 홀로서는 ‘느린 학습자’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회색지대’… 전체 인구의 13%로 적잖은 규모
‘느리다’ 이유로 따돌림-채용 거부… 사회적 기업서 일하며 타인과 교류
부모들 “일부러 장애 판정 받기도”
‘경계선 지능 지원법’은 국회 계류… 정부 “교육-구직 지원 강화할 것”

민호 씨가 이날 할 일은 1000평에 달하는 사탕수수 밭을 고르고 잡초를 뽑는 것. 그는 지난해 심었다가 겨우내 죽은 사탕수수 묘목을 담을 손수레를 창고에서 꺼내 왔다. 벌써 4년째 언 땅을 깨우고, 사탕수수를 심고, 열매를 수확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전엔 면접조차 거부당하거나 남들보다 느리다는 이유로 일주일 만에 해고당한 적도 있다. 민호 씨는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 ‘회색 지대’
현재 민호 씨와 같은 경계선 지능인에 대한 법적인 정의는 없다. 통상적으로 경계선 지능인은 지능지수(IQ)가 71∼84 사이인 사람을 뜻한다. 지적장애 기준(IQ 70 이하)과 정상 발달 범위(IQ 85 이상)에 속하지 않아 비장애인도 장애인도 아닌 회색 지대에 있는 셈이다.

경계선 지능인은 겉모습만으로는 쉽게 비장애인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간단한 대화를 하거나 물건을 사는 등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개념을 학습하고 동시에 여러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직장에서도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업무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분위기에 맞게 행동하는 능력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도 경계선 지능인의 특징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면 할 수 있어요”
경계선 지능인이 주로 일하는 곳은 공익적 목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적 기업이다. 민호 씨가 근무하는 농장엔 19∼37세 경계선 지능 청년 26명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사탕수수 재배부터 가공, 음료 판매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다. 재희 씨도 경계선 지능인을 채용하는 사회적 기업 ‘프리웨일’에서 바리스타로 1년째 일하고 있다.
일을 배우거나 처리하는 속도는 저마다 다르다. 민호 씨는 1년 넘게 일하다 보니 농장 일이 손에 익었고, 이제는 후배인 이하정(가명·23) 씨를 가르쳐 줄 정도가 됐다. 24일에도 민호 씨는 하정 씨가 죽은 사탕수수 묘목을 삽으로 파내려 하자 “손으로도 뽑을 수 있다”며 시범을 보였다. 정현석 사탕수수 대표는 “처음부터 8시간씩 풀타임 근무를 하지는 않고 적응 기간을 거쳐 근무 시간을 늘려 나간다”고 말했다.
일에 자신감이 붙자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재희 씨는 프리웨일에서 일하기 전에는 말을 하면 오해를 살까 봐 다른 사람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페에서 동료, 손님과 소통하면서 ‘내 의견을 말해도 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재희 씨는 이제 메뉴를 고민하는 손님에게 먼저 다가가 “평소에는 주로 어떤 음료를 좋아하느냐”며 메뉴 추천을 한다.

● “장애인 아니라 고용 의무 없어” 채용 사각지대
‘느린 학습자’인 경계선 지능인은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제 몫을 할 수 있다. 실수나 실패에 대한 불안도가 높기 때문에 시간 약속을 잘 지키고 성실한 데다 반복 작업을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이다. 서영철 프리웨일 대표는 “반복 업무를 잘하기 때문에 3∼6개월가량 적응을 거치면 일에 숙달된다”고 말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경계선 지능인을 고용할 유인이 적다. 현재 상시근로자 50명 이상 사업장은 민간기업은 3.1%, 공공기관은 3.8% 이상 장애인을 고용해야 한다. 기업으로선 경계선 지능인을 많이 채용해도 장애인 고용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뽑을 이유가 없다. 장애인 일자리도 경계선 지능인은 지원할 수 없다.
경계선 지능인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도 같은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프리웨일은 전국 최초로 경계선 지능인 고용 비율이 80%를 넘었으나 경영상 이유로 본점은 이달까지만 운영하고 문을 닫는다. 중증장애인 생산품은 우선 구매 비율이 있어 공공기관을 통해 판로를 찾을 수 있지만, 경계선 지능인은 장애인이 아니라 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각지대에 놓인 경계선 지능 청년들은 혼자 취업 준비를 하다가 낙담해 취업을 포기하거나, 차라리 장애 등록을 해 지원을 받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서울 양천구에서 20대 경계선 지능 아들과 함께 사는 이모 씨(54)는 “아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특수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졸업한 이후로는 아무 지원이 없어 집에서 쉬고 있다”며 “일부러 IQ 검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지적장애 판정을 받으면 장애인 일자리에라도 취업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 국회 문턱 못 넘은 ‘경계선 지능인 지원법’
국회에 청년 경계선 지능인 지원법이 발의돼 있지만 상임위원회 문턱조차 넘지 못한 상태다. 2014년 경계선 지능인이 ‘느린 학습자’라는 이름으로 주목을 받은 이후 2016년 ‘느린 학습자 지원법’으로 불리는 초중등 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시행됐다. 그러나 이 법은 학령기에만 적용될 뿐 청년층은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다. 청년층을 지원하기 위해 ‘경계선 지능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 등이 2023년부터 14건 발의됐으나 한 건도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정부는 경계선 지능인을 별도의 장애 유형으로 신설하기보다 교육과 구직 활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IQ를 기준으로 경계선 지능을 판단한다고 했을 때 1Q 84와 85의 차이가 크지 않고, 경계선에 있는 경우 컨디션에 따라 정상 지능이 될 수도 있어 장애 등록을 하기는 어렵다”며 “부모 등 보호자도 장애 등록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경계선 지능 청년들은 구직을 위해 용기를 갖고 도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재희 씨는 “나도 거절당한 경험이 많아서 새로운 시도가 늘 힘들었다”며 “하지만 눈 꼭 감고 용기 내보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했다. 민호 씨는 “나와 같은 경계선 지능인 청년들의 취업에 도움을 주고 싶다”며 “지금 잘 배워서 몇십 년 뒤에 내 농장을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고양=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고양=신예린 기자 yr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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