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기름값 1만원, 청소차도 멈췄다
차 없는 거리엔 쓰레기만 가득
응급차·버스에 기름 우선 공급
교통편 없어 대학도 한달 휴교

지난 20일(현지 시각) 쿠바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 앞에서 만난 택시 기사 루이스씨는 약 20㎞ 떨어진 아바나 시내까지 35달러(약 5만2500원)의 요금을 불렀다. 이날 아침 쿠바에 오기 위해 기자가 미국 버지니아주 자택에서 약 20㎞ 떨어진 워싱턴DC 로널드 레이건 공항까지 지불한 택시 요금이 40달러(약 6만원)였다. 미국 1인당 국민소득은 약 9만달러(약 1억3500만원), 시장 환율을 반영한 쿠바의 1인당 체감 소득은 약 2000달러(약 300만원)대다. 양국 소득 차이는 45배에 달하지만, 택시 요금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루이스씨는 “1월 초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한 뒤 베네수엘라에서 오는 원유 공급이 끊기면서 쿠바 전역에 기름이 바닥났다”며 “휘발유 1리터 가격이 암시장에서 7달러(약 1만500원)를 넘었다. 택시 요금을 이렇게라도 받지 않으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에서 20리터씩 휘발유를 넣을 수 있는 티켓을 10일에 한 번씩 준다”며 “정부 공급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3달러(약 2000원)지만, 연비 7~8㎞/L의 낡은 중국산 엔진으로 20리터는 하루면 바닥난다. 생계를 위해 암시장에서 기름을 넣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마저도 정부 공급 휘발유는 택시, 버스, 응급차 등에 우선적으로 배분되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은 한 달에 한 번 기름을 넣을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것이다.
기자가 미국에서 왔다고 하자 루이스씨는 미국 휘발유 가격을 궁금해 했다. 2월 말 터진 대(對)이란 전쟁 후 미국 휘발유 값은 30% 급등해 갤런당 4달러까지 치솟았다. 리터당 약 1600원 수준이다. 그럼에도 쿠바 휘발유 가격이 미국보다 거의 7배 비싼 것이다. 루이스씨는 못 믿겠다는 듯 연신 놀라워하며 “미국 휘발유 가격이 그렇게 싼 게 사실이냐”고 허탈해했다.

◇인적 끊긴 주유소, 텅 빈 도로… 아바나 명물 클래식카도 자취 감춰
공항 렌터카 업체는 경차 하루 렌트 비용으로 미국 시세보다 2배 비싼 150달러(약 22만원)를 제시하면서 “아바나 시내에서 기름을 넣을 수 있는 주유소는 3곳밖에 없다.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실제 쿠바를 대표하는 아바나의 ‘나시오날 호텔’ 옆 주유소조차 인적이 끊긴 지 오래돼 보였다. 석유 재고가 있는 주유소를 어렵게 찾아가 봤는데, 예상보다 주유를 하려는 차량 행렬은 길지 않았다. 주유소 관계자는 “정부에서 하루에 주유를 할 수 있는 차량 대수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줄이 무작정 늘어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대신 인적이 드문 도로 한켠에 세워진 관광버스 등에서 주민들이 몰래 기름을 받아가는 등 암시장으로 흘러나온 석유가 유통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쿠바의 우방인 베네수엘라는 한때 하루 약 10만 배럴의 원유를 쿠바에 공급하고, 쿠바는 그 대가로 의사를 비롯한 정보·보안 인력까지 파견하며 현물 교환을 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하루 약 3만 배럴 이하 수준까지 줄어든 베네수엘라산 원유 공급이 마두로 체포 이후 트럼프의 제재 조치로 석 달째 완전히 끊기면서 쿠바는 고사(枯死) 직전 상태로 내몰렸다. 트럼프는 “쿠바는 지금 매우 약해진 상태”라며 “쿠바 접수를 포함해 쿠바에 대해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공언했다.


아바나 시내 어디를 가든 도로는 텅 빈 상태로 한적했다. 왕복 6차선을 인도처럼 걸어 다니는 주민이 많아 차도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관광객도 줄어들었지만 연료를 구하기 힘든 탓에 쿠바의 상징과도 같았던 형형색색의 ‘올드카’와 ‘클래식카’ 역시 자취를 감췄다. 대신 그 자리에는 리튬 배터리가 내장된 전기 오토바이와 이를 개조한 삼륜 택시들이 많이 보였다. 기름 부족으로 버스 배차 간격 역시 4시간 이상 늘어나면서 곳곳의 정류장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인파가 장사진을 이뤘다.
쿠바의 지도자였던 피델 카스트로가 졸업한 아바나 시내 한복판의 아바나 대학교를 찾아가 봤지만 입구에는 통행 금지 줄이 걸려 있었다. 학교 앞에서 만난 대학생은 “학교가 수업을 중단한 지 한 달이 넘었다”며 “현재 1만명의 학생이 재학 중인데 기름 부족 사태로 버스 등 교통편이 마비되면서 학생들이 학교에 오기 힘들게 돼 잠정 폐쇄됐다”고 했다.

과거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었던 아바나의 골목들은 이제 악취가 가득한 거대한 쓰레기장이 됐다. 쓰레기 수거 차량 역시 연료 부족으로 배차 간격이 점점 늘어나면서 몇 달째 쿠바 전역이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주민들은 “심하면 쓰레기 산이 골목마다 100m씩 이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지난달에 아바나 내 쓰레기 수거차 106대 중 62대가 아예 운행을 하지 못했다. 잦은 정전과 함께 일부 지역에서 가스 공급마저 불안정해지면서 수도 아바나에서조차 쓰레기 더미 옆에서 나무 땔감을 모아 요리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고급 호텔 인근에 있는 자택에서 나무 장작불로 점심을 준비하던 한 아바나 주민은 “관광객들은 모르는 이게 진짜 쿠바의 모습”이라고 했다.
아바나의 말레콘 해안가 도로에 있는 주(駐)쿠바 미국 대사관 역시 연료 부족 사태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쿠바에 대한 석유 봉쇄 조치를 시행 중인 상황에서 미 대사관에 공급되는 석유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국가 정전 사태에 대비한 미 대사관의 디젤 발전기용 연료가 부족하게 되자, 최근 미 대사관은 쿠바 정부에 “연료 수입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쿠바 측은 “염치 없는 짓”이라며 수입 승인을 즉시 거절했다.
이 소식은 현지 쿠바 주민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한 친지들이 보내준 달러로 2000달러(약 300만원)짜리 미국산 전기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디에고씨는 “나는 운이 좋은 편이지만, 현재 많은 쿠바인은 이동을 하고 싶어도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며 “미국이 도대체 양심이 있기는 한가. 미 대사관에 석유를 공급하기 전에 쿠바에 대한 제재부터 해제하는 것이 순서”라고 했다.
일부 외신은 러시아산 석유를 실은 유조선이 쿠바로 향하고 있다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석유 위기 앞에 아바나 주민들의 불안은 점점 커져가는 모습이었다. 택시 기사 루이스씨는 “정부가 모아둔 석유도 곧 바닥날 텐데 그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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