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남은 거장의 '암투병 서사'…이제는 보름달과 친구가 됐을까

유주현 2026. 3. 2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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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치 사카모토 ‘마지막 나날’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2023년 타계 전 3년 6개월 간 써내려간 자필 일기를 토대로 한 영화다. [사진 영화사 진진]
“아리랑은 긴 역사와 민족 전체가 만든 음악이죠. 서양인도 감동받더군요. 5음계라는 게 아프리카로부터 전 세계로 퍼져나간 인류 보편의 음계라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2018년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위해 온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왜 아리랑을 외국인들도 좋아할까’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동양인 최초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을 비롯해 클래식과 전자음악, 미술까지 종횡무진했던 이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이자, ‘교수’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지성의 소유자다운 대답이라 생각했었다. 세월이 흘러 아리랑의 마법은 이제부터 BTS 월드투어에서 증명될 테지만, 류이치 사카모토는 꼭 3년 전 오늘 세상을 떠났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3년 6개월간 기록한 일기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감독 오모리 켄쇼)가 4월 1일 개봉한다. 가족이 촬영한 내밀한 영상에 점점 야위어 가는 사카모토의 육신과 음성이 오롯하고, 사후 촬영분엔 그가 남긴 흔적들이 정갈하게 담겼다. 인연이 깊었던 배우이자 무용수 다나카 민이 그에게 빙의해 일기를 읽는다. ‘넓은 숲의 빗소리/ 내 마음을 채워다오’(20210529) ‘내 몸은 너덜너덜하다’(20210808) ‘음악을 남기는 일/ 남길 음악/ 남기지 않을 음악/ 안개처럼 흩어지는 음악’(20221229) ‘음악, 보름달’(20230316)…. 시처럼 짤막한 일기 속에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예술가의 심정이 비친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2023년 타계 전 3년 6개월 간 써내려간 자필 일기를 토대로 한 영화다. [사진 영화사 진진]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마지막 책 제목이자 그가 음악을 맡았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사랑’(1995)에 등장하는 원작자 폴 볼스의 음성이 프롤로그다. ‘사람은 생이 영원한 양 살아가지만 무수히 되풀이되는 자연의 순환을 단지 몇차례 겪다가 떠날 뿐’이란 말도 한다. 대표곡 ‘아쿠아’와 한때 자신을 드뷔시의 환생이라고 여겼던 것을 오마주하듯 물에 뜬 달빛과 함께.

영화는 2019년 비 내리는 봄날, 뉴욕 자택 마당에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는 장면으로 열린다. 20여 년 전부터 인위적인 음악보다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며 이우환의 ‘모노하(物派)’를 음악으로 구현하려 했던 사카모토가 ‘피아노가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가는지’ 관찰을 시작한 것. 아직 건강한 사카모토가 건반을 두드리니 빗소리와 피아노의 2중주가 되는데, 이듬해 암 재발 후 죽음을 향해 가는 사카모토와 함께 피아노도 자연 풍파에 너덜너덜해져 간다.

암 선고 다음날 전 세계 동시 온라인 콘서트를 묵묵히 소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난주 BTS 컴백쇼 넷플릭스 전 세계 스트리밍과 사뭇 대조되서다. 조 단위 숫자가 난무하는 온갖 욕망의 떠들썩한 집결체를 바라보며 쌓인 피로가 생의 유한함에 관한 ‘일기’로 씻겨졌달까. (그는 BTS 슈가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꼽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2023년 타계 전 3년 6개월 간 써내려간 자필 일기를 토대로 한 영화다. [사진 영화사 진진]
조용히 죽음만 기다린 건 아니다. 사카모토도 ‘앞으로 10년 더 음악을 만들고 싶다’며 적극적인 치료를 택한다. 유작 앨범 ‘12’ 녹음, 3·11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아이들로 직접 꾸린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 공연도 적극 이끈다. 하지만 수술과 항암치료로 쇠약해지며 ‘체력이 없으면 음악도 들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에너지가 없을 땐 빗소리가 구원이 된다.

체력을 회복하면 필사적으로 음악 작업을 이어간다. 또 다른 다큐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로 공개된 NHK홀 ‘마지막 콘서트’를 위한 힘겨운 연습 과정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죽음 앞에서 음악을 할 때만이 자유로운 자기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명 3~6개월 선고를 받고서도 ‘음과 음 사이 울림의 음악을 쓰고 싶다’며 좋아하는 모든 소리를 담은 교향곡 메모를 남긴다. 70년대 테크노 전자음악을 선도하며 세계를 호령했지만 말년에 ‘구름의 움직임 같은 음악’을 추구한 것은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2023년 타계 전 3년 6개월 간 써내려간 자필 일기를 토대로 한 영화다. [사진 영화사 진진]
끝내 닥쳐온 마지막 일기는 2023년 3월 26일. 고통을 짐작하게 하는 숫자의 나열이다. 같은 날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 공연 영상을 보며 미소짓던 그는 28일 타계 직전까지 의식이 없는 채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빗소리와 이중주를 벌인다.

엔딩엔 사카모토가 3년 6개월 동안 직접 찍은 보름달들이 배웅나온다. 나뭇잎 사이, 구름 사이, 도쿄타워 위에 뜬 각양각색의 보름달이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보름달을 보게 될까. 4월 15일엔 솔로 앨범 ‘음악도감’에서 동서양 음악을 충돌시키던 시절을 담은 엘리자베스 레나드 감독의 다큐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도쿄 멜로디’(1984)가 국내 첫 개봉된다. 80년대 유럽에서만 상영됐고, 일본에서도 지난 1월 처음 개봉됐다. 영화 ‘괴물’의 OST로 ‘아쿠아’를 택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의 음악을 ‘시대를 초월해 듣게 될 음악’이라고 했었다. 4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젊은 날의 류이치 사카모토가, 그의 음악이 다시 우리에게로 온다.

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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