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쇼크 깊어지는데…매달 4000가구 전기 쓰는 도심 전광판
<상> ‘빚’으로 돌아오는 도심의 빛
공인중개사사무소·분양 홍보관 등
한밤중까지 켜둔 실내조명도 문제
백화점 등은 LED 조명 도입했지만
여전히 매달 수백가구 쓸 전력 사용
“빛 밝기 중심의 미디어시설물 규제
얼마나 많은 전기 쓰느냐도 따져야”
호주 유학을 마치고 최근 귀국한 A(36) 씨는 밤 11시가 넘도록 불이 켜진 광화문 일대 빌딩들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미 업무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인데도 오피스 빌딩은 물론 부동산 간판까지 환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A 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경쟁하듯 밤거리를 밝히는 초대형 전광판들이었다. A 씨는 “10여 년 만에 광화문 거리를 걸어보니 역사박물관에서 시청 앞까지 옥외 전광판과 미디어파사드가 즐비했다”며 “호주에서는 매년 3월 마지막 주 토요일 밤에 1시간 동안 불을 끄는 ‘어스아워(Earth Hour)’ 같은 에너지 절약 캠페인이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고 말했다.

중동발 에너지 수급 불안이 전 세계를 흔들면서 우리 정부도 에너지 절약 대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일상 속 에너지 낭비는 여전히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서 전력과 천연가스 등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려면 단기 처방을 넘어 사회 전반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7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 중구의 한 백화점에 설치된 미디어파사드는 2022년 기준 월평균 4만 5000㎾h의 전력을 사용했다. 해당 백화점은 에너지 절감을 위해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도입하면서 전년 동기 월평균 8만 6400㎾h였던 전력사용량을 절반 수준으로 줄였다. 그럼에도 이 전력량은 2022년 서울 가구당 월평균 전력사용량(296㎾h) 기준으로 약 152가구가 한 달간 쓸 수 있는 규모다. 외벽 장식 하나에 사실상 작은 마을 단위의 전력이 투입되는 셈이다.
옥외 전광판이 밀집한 서울 강남구 코엑스 일대의 전력 소비도 적지 않다. 이 일대 옥외 전광판 17개가 한 달 동안 사용하는 전력량은 약 35만 8960㎾h로 일반 가구 1200가구 이상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광화문과 명동 일대 옥외 전광판을 포함하면 약 4000가구가 쓸 전력량을 이 세 지역의 전광판이 쓰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민간의 경제활동을 무작정 제약할 수는 없더라도 에너지 위기가 현실화한 현시점에서는 밝기를 낮추거나 가동 시간을 줄이는 방식의 자발적 절전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공공기관은 민간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지방자치단체가 사용하는 전력은 공공용으로 산업용 등 다른 전기에 비해 사실상 헐값에 공급되는 측면이 있다”며 “민간기업은 영업 활동과 직결돼 있어 일률적으로 문제 삼기 어렵지만 지금 같은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지자체가 미디어파사드나 각종 빛 축제에 많은 전력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초대형 전광판을 둘러싼 관리 기준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서울시는 2018년 발표한 ‘미디어 시설물의 설치 및 관리에 관한 기준’에서 옥외 전광판과 미디어파사드 등 미디어 시설물의 규제 기준을 빛의 밝기를 뜻하는 휘도(cd/㎡) 중심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는 휘도뿐 아니라 공간 1㎡당 얼마나 많은 전력을 쓰는지를 보여주는 조명밀도(W/㎡) 역시 중요한 기준으로 본다. 단순히 ‘얼마나 밝은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는가’를 함께 따져야 한다는 의미다.
에너지 대란 국면에서 전력 낭비를 줄이려면 한밤중까지 불을 켜두는 사회적 관행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비판 또한 나온다. 광화문과 강남 등 번화가의 대형 빌딩 가운데 심야 시간대에도 내부 조명을 켜둔 채 주변을 밝히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수도권과 지방을 막론하고 공인중개사사무소, 가구 판매점 쇼룸, 분양 홍보관 등도 영업 종료 후까지 실내를 밝게 유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행법상 실내 조명이 창밖으로 새어나가는 문제는 별도 규제 대상이 아니어서 제도적 대응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송두삼 성균관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야간의 과도한 조명은 빛 반사로 시민들에게 눈부심 등 불편을 줄 수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며 “낮과 밤의 밝기를 똑같이 유지할 필요는 없는 만큼 전력 낭비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대안은 시간대별 밝기 조정과 운영 시간 단축”이라고 말했다.
양지혜 기자 hoje@sedaily.com남소정 견습기자 ns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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