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알렉시예비치 "저항의 힘 보여준 한국인들에 경외감"
황석영 작가 강연문 대독…"한국은 '안보국가' 한계 못 벗어나"

(파주=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자유는 우리의 의지에 달린 손쉬운 전리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압니다. 자유란 긴 여정이라는 것을."(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지닌 비무장지대(DMZ) 캠프 그리브스. 한때 미군이 주둔했던 캠프 그리브스에서는 27일 'DMZ세계문학페스타 2026'가 열렸다.
이날부터 나흘간 열리는 DMZ세계문학페스타는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한국작가회의가 공동 주최하는 행사로, 평화와 공존을 위한 문학의 역할을 조명하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첫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벨라루스 소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78)의 기조강연이었다.
알렉시예비치는 '침묵의 나라에서, 우리는 어떻게 말하는 법을 배웠는가'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에서 침묵을 강요하는 억압적 정치 현실을 고발했다.
194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그는 벨라루스에서 자랐으며, 다양한 인물의 인터뷰를 논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한 작가로 유명하다.
2차대전에 참전했거나 전쟁을 목격한 여성 200명을 인터뷰해 정리한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1983년 출간된 이 책은 소비에트 여성의 아픔과 고뇌에 주목했다는 이유로 폐기됐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인 1985년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일렉시예비치는 기조 강연에서 1990년대 소련 해체로 공산주의는 패배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며 "공산주의는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우크라이나 땅을 피로 물들이고 있다. 유럽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중세가 펼쳐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벨라루스가 처한 암울한 현실과 '벨라루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벨라루스 혁명'은 2020년 8월 벨라루스 대선과 관련 부정선거 의혹이 불거지며 일어난 벨라루스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주화 시위를 말한다.
1994년부터 장기 집권한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에 대한 국민의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지지를 얻은 루카셴코가 정권을 유지하며 시위는 강제 진압됐다.
알렉시예비치는 기조강연에서 "국민들이 저항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로 결심했다"며 그가 인터뷰한 19세 대학생인 폴리나, 27세 프로그래머 아르카디, 49세 심리학자인 올가 메틀리츠카야 등 벨라루스 혁명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일렉시예비치는 "현재까지 약 2천명이 벨라루스에서 정치적 이유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체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면서도 침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나는 목소리를 찾고 있습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침묵 역시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무서운 존재입니다."
질의응답에서 일렉시예비치는 한국의 12·3 비상계엄 사태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한국 국민들에게 경외감을 느낀다"며 "여러분께서 시민 저항의 힘을 잘 보여줬다. 시민 저항이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또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증명해 주셨다"고 말했다.
이번이 네 번째 한국 방문이라는 그는 "'만약 한국 국민이 거리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 왔을 수도 있다'는 말을 비서에게 했다"며 "오늘 이곳에 오면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고 강조했다.
알렉시예비치는 암울한 국제정세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이야기하지만, 꼭 그렇진 않다.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찾고 있다"며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것이고. 새로운 세대는 민주주의를 잃는 것을 가만히 보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새로운 말을, 새로운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며 "우리가 삶 앞에서 무력해질 때, 저항의 형식을 찾지 못해 힘들 때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 생각하도록 다그쳐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한국작가회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27/yonhap/20260327141927601xqvr.jpg)
이날 행사에는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황석영(83) 작가가 참석해 기조강연을 할 예정이었으나, 그는 건강 문제로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문학페스타 상임운영위원장인 송경동 시인이 대독한 강연문에서 황석영은 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이야기했다.
황석영은 "남한과 미국의 보수 세력은 언제나 평화로 가는 막바지의 길에서 급회전하거나, 장애 요인을 만들어 오랜 평화를 위한 노력을 좌절시켜 왔다"며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한국이 겉으로는 선진국의 모양을 갖추었지만, 내적으로는 '안보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계를 짚었다.
그는 또 "이제 북조선은 수십 년의 봉쇄와 제재 속에서 민중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가까스로 협상의 지렛대를 획득했고, 남한은 거듭된 안보국가 파시즘의 퇴행을 두 차례나 물리치고 '빛의 혁명'을 완료하고 있는 중"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우리는 평화로 나아가는 몇 개의 계단을 쌓아 올렸고 이제 마지막 계단을 만들었다"며 "바로 저 앞의 문을 열면 밝은 빛이 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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