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만’은 어쩌다 ‘마법의 숫자’가 됐을까 [취향의 발견]

손미정 2026. 3. 27.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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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의 천만 달성…韓 영화 ‘변곡점’
‘불가능’→‘실현 가능’ 목표로 자리매김
숫자보다 내실이 핵심 “천만보다 수익”
‘취향의 발견’은 나도 몰랐던 나의 문화적 취향을 알려주는 코너입니다. 몰라도 상관없지만, 알면 의외로 도움이 되는 문화 상식을 친절하게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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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 [쇼박스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천만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입니다. 지난 6일 개봉 31일 만에 천만 관객을 넘은 이 영화는 1500만 고지까지 돌파했죠. 2년여 만에 우리 곁에 돌아온 천만 영화이자, 25번째로 천만 고지에 오른 한국 영화, 그리고 사극으로는 네 번째 달성입니다.

간만에 ‘왕사남’의 속이 뻥 뚫리는 흥행 질주를 지켜보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영화계에도 다시 온기가 돌 것이란 기대감이 커졌습니다. 영화를 제작한 임은정 온다웍스 대표는 최근 인터뷰에서 “업계 분들로부터 ‘계획해도 못하는 것을 ‘왕사남’이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있다”며 소감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모처럼 활기를 되찾은 분위기 속에서,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바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마법의 숫자, ‘천만’ 대해서죠.

‘천만(1000만)’은 어쩌다 ‘대박’의 기준이 된 것일까요. 500만도, 2000만도 아닌 왜 1000만일까요. 그리고 왜 이렇게 우리는 천만 영화가 등장하길 간절히 기다리는 걸까요. 이번 ‘취향의 발견’에서는 기분 좋은 천만 영화의 등장을 맞아 ‘흥행’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실미도·태극기·왕의 남자, 천만 트리오의 등장

‘천만’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숫자가 아닙니다. 2000년대 초중반 극장가를 뒤흔들어 놓은 세 편의 영화가 그 시작이었죠. 이들의 등장으로 멀게만 보였던 천만이란 유리 천장이 깨져버립니다. 꿈의 숫자가 현실 가능한 목표가 되고, 흥행의 새 기준으로 자리 잡게 만든 사건. 바로 ‘실미도’(2003)‘태극기 휘날리며’(2004), ‘왕의 남자’(2005)의 천만 달성입니다.

영화 실미도(2003)

포문을 연 것은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입니다. 역대 국내 개봉작을 통틀어 처음으로 천만 고지를 밟은 영화죠. 실미도 이전까지 최고 흥행작의 자리를 지킨 것은 818만 관객을 동원한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였습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초라 불리던 ‘쉬리’(1999)가 620만 정도였습니다.

1968년 실미도 부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110여억원이라는 당시 기준 대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된, 실화와 액션이 결합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였습니다. 군사정권과 국가에 의한 폭력, 희생 등 무거운 주제는 오히려 관객의 호기심과 역사적 관심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죠. 극장가는 들썩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어 버리죠. 누적 관객 수 1108만명.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숫자가 현실이 된 사건이자, 한국 영화 역사의 ‘분기점’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곧이어 이듬해에 또 한편의 천만 영화가 등장합니다. 1170만 관객을 동원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입니다.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대규모 전투 장면과 기술적 완성도를 앞세운 이 영화는 다시 한번 천만이란 숫자를 대중들에게 각인시키죠. 그리고 막 등장하기 시작한 ‘천만 영화’를 일회성이 아닌 하나의 기준이자 흐름으로 정착시킨 영화가 나타납니다. 바로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입니다.

영화 ‘왕의 남자’(2005)

두 광대의 우정과 사랑, 그 뒤에 감춰진 왕의 슬픔을 담은 영화는 당시 신드롬적 인기를 얻으며 1230만이란 대기록을 세웁니다. 개봉 초기 다소 적은 스크린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입소문이 흥행의 불씨가 됐습니다. 감각적인 시대극 연출과 인간의 감정에 대한 깊은 서사,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가 관객들을 사로잡았죠. 영화는 앞선 두 작품처럼 블록버스터가 아니라도,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으로도 ‘천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연이은 천만 영화의 등장은 단순한 기록 경신을 넘어 영화 흥행의 ‘단위’ 자체를 바꿔버립니다. 점차 투자·제작사 사이에서는 이때부터 손익분기점 달성이 아닌 ‘이 영화가 천만을 갈 수 있는 영화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기 시작하죠. ‘천만’이 그저 큰 숫자가 아니라 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호임을 읽어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천만은 흥행 잠재력을 평가하는 기준이자 흥행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시장성과 관객의 수라는 목표도 더 뚜렷해지죠.

최진희 킹스칼리지 런던 영화학 교수는 저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아시아의 히트메이커 세계시장의 도발’(2010)에서 “1990년대 후반 이후 관객 규모와 박스오피스 성적이 제작·배급 전략의 핵심 기준이 됐고, ‘얼마나 많은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가?’가 제작·마케팅의 중심 문제가 됐다”고 분석했습니다. 산업 내부에서도 천만이 상업적 성공의 중심 지표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죠.

“2000만? 가능하지도, 올바른 숫자도 아니다”
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연합]

20여년을 건너 다시 ‘왕사남’의 이야기로 돌아와 봅니다. 영화가 개봉했던 2026년의 겨울을 지나 봄을 맞고 있는 오늘날, 전 국민의 큰 관심 중 하나는 ‘왕사남’의 최종 성적입니다. 누적 관객 수 기준 역대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 순위 3위를 달리고 있는 ‘왕사남’의 종착지는 어디가 될까요.

가장 희망적인 시나리오를 예상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인구는 약 5000만명입니다. 그중 법적으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12세 이상’ 인구는 4600만명 내외입니다. 좀 더 들어가서, 고령층 등을 제외하고 실제 극장을 가는 유효 관객 수는 어림잡아 3000만명에서 최대 3500만명 수준으로 추산됩니다. 단순 계산을 해보면, ‘왕사남’에게는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약 1500만명의 예비 관객이 존재하는 셈이 됩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고 만만하지 않습니다.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 ‘명량’(2014)이 세운 1761만 명의 기록은 10년이 넘도록 깨지지 않고 있죠. 다만 지금의 기세라면 ‘왕사남’이 이 기록을 뛰어넘고 역대 최고 흥행작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작품의 인기가 일종의 ‘신드롬’에 가까운 흐름을 보이는 데다, 뚜렷한 경쟁작이 부재하다는 점이 결정적 요인 중 하나입니다.

업계는 일단 ‘왕사남’의 흥행 상한선을 ‘명량’으로 보는 분위기입니다. 나아가 이 영화가 ‘명량’을 추월하더라도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것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죠. 일각에서 고개를 드는 ‘2000만 시대’에 대한 기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갖는 의견이 많습니다. 장항준 감독도 한 방송 인터뷰에서 2000만 관객 공약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2000만 관객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 ‘현실’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영화 명량(2014)

사실 ‘천만’은 현실적이면서도 그 자체로 비현실적인 숫자입니다. 25편의 한국 영화가 그 숫자를 증명해 냈다고 해서 그 과정이 쉽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불가능을 가능케 한 여정들에 가까웠죠.

‘N차 관람’(한 영화를 여러 번 관람하는 것)을 배제하고 생각해 보면, 천만 영화는 우리나라 국민 ‘5명 중 1’명이 관람한 영화란 뜻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유효 관객 수 약 3000만명을 적용하면, 그 숫자는 ‘3명 중 1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죠. 따라서 ‘천만 영화’는 실제 극장에 갈 수 있는 관객 대부분이 관람해야만 얻을 수 있는 수식입니다. 20년이 넘게 ‘천만’이 변함없이 흥행의 척도로 여겨지고 있는 이유도, ‘2000만 관객’이 불가능한 숫자란 시각의 배경도 여기에 있죠.

천만이란 결과를 내는 데 필요한 ‘필승 공식’에 대한 고민과 연구는 오늘날에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다양한 의견 가운데서도 천만은 작품이 가진 ‘자체 기량’와 ‘외부적 요인’이 맞물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목표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죠. ‘명량’의 초고속 흥행도 여름 성수기 개봉과 압도적인 스크린 수라는 든든한 배급 전략, 경쟁작의 부재, 여기에 이순신이 보여준 위기 극복의 서사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정치적 불안이 모두 함께 만들어낸 낸 결과였습니다. 뒷심을 받쳐줄 관객의 입소문은 기본이고요.

[게티이미지뱅크]

이 시점에 우리는 상영관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만 영화의 역사는 곧 멀티플렉스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실미도’에 이은 한국 영화의 천만 기록들은 멀티플렉스 체인이 급속도로 확장한 시기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1998년 500여개였던 전국 스크린 수는 2003년 1132개, 그리고 2004년 1451개로 3배 가까이 증가했죠. 전 국민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시간에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흥행의 시작은 작품의 스토리텔링과 입소문이지만, 기록을 만드는 것은 스크린 수 입니다. 많은 상영관을 확보할수록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동 시기에 개봉한 경쟁작이 없다면 당연히 스크린을 확보하기 쉬워지겠죠.

‘왕사남’의 경우 개봉 6주 차인 13~15일 매일 2000개가 넘는 스크린을 확보했는데요. 아마도 이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왕사남’의 상영관 점령이 영화 발전에 과연 긍정적이기만 할지는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50%가 넘는 스크린을 차지하며 독점 논란에 휩싸였던 ‘명량’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면요.

이에 대해 장항준 감독은 “한국 영화에는 여러 작품이 있다. 한 작품만 지나치게 잘되는 상황보다는 전체 영화계가 함께 잘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개인적인 성공도 의미 있지만 동료 영화인이 함께 웃을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천만’은 성공의 또 다른 이름일까
영화 괴물(2006)과 국제시장(2014) 포스터

천만은 ‘흥행’과 ‘성공’의 척도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상에 가깝습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어디를 가든 테이블 위에 오르고, 관여도가 낮은 대중에게까지도 자연스레 영화를 보러 가야 할 이유를 만들죠. 최근 한 지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왕사남’을 안봤더니 어딜 가서 대화에 끼지를 못하겠어.”

모든 미디어가 영화의 스코어에 주목하고, 대중은 마치 스포츠 경기를 보듯 기록 경신을 응원합니다. 그 기억 속에는 한국형 장르물의 저력을 보여준 ‘괴물’(2006)과 ‘부산행’(2016)이 있었고, 복고의 귀환을 알린 ‘국제시장’(2014), 오컬트의 가능성을 보여준 ‘파묘’(2024), 그 자체로 사회적 담론이 됐던 ‘택시운전사’(2017)와 ‘변호인’(2013) 등이 자리하고 있죠.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각자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한 편의 영화로 공통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며 하나로 이어지는 것. 천만의 등장은 콘텐츠를 통한 ‘집단적 경험’이 가장 뚜렷하게 발현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역대 한국 영화 흥행 순위

그렇다면 천만 영화는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숫자는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가장 객관화된 지표임은 틀림없습니다. 미국에도 ‘10억달러(한화 1조4995억원) 영화’, 일본도 ‘100억엔(한화 939억원) 영화’라는 흥행 기준이 존재하는 것처럼요. 하지만 수익 측면에서 보자면 관객 수와 영화의 성공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돈을 많이 ‘번 것’과 많이 ‘남긴 것’은 차이가 있으니까요.

지난해 ‘작은 영화’의 저력을 보여줬던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20만명)도, 올 초 흥행의 신호탄을 쐈던 김도영 감독의 ‘만약의 우리’(246만명)도 모두 천만에 훨씬 못 미치는 성적을 올렸음에도 ‘성공작’으로 평가를 받은 이유는 투자 비용 대비 수익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작품의 제작비는 각각 10억원, 30여억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사남’도 오랜만에 등장한 천만 영화이기 이전에 100여억원(손익분기점 260만명)이 투입된 중예산 영화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많이 남아야 투자 여력이 커지고, 그만큼 산업에도 더 많은 기회가 생겨날 수 있으니까요.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영화의 성공은 천만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수익이 많이 남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가장 성공한 영화는 ‘명량’이 아닌 ‘7번방의 선물’과 ‘극한 직업’”이라면서 “‘왕사남’과 같이 참신한 기획력으로, 독립영화와 중간 규모의 가벼운 대중 영화들이 계속해서 나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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