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노래 ‘부용산’과 목포 항도공립여자중학교 (하) [남도 학교기행]

#안성현의 가계
안성현(安聖鉉, 1920~2006)의 본적은 나주시 남평면 교촌리이지만, 태어난 곳은 교촌마을에서 북향 남평 2길에서 오른 방향으로 꺾어 골목길 막다른 집, 동사리 217번지이다. 남평초등학교 기점 서쪽으로 직선 350m 지점이다. 1936년 말 아버지와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이름이 국현(國鉉)이었는데, 성장 후 성현으로 개명하였다.
영암이 낳은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 김창조의 수제자로서 명인의 반열에 오른 안기옥(安基玉, 1894~1974)이 그의 아버지이다. 함흥공립중학교 5년 과정을 마친 후 1941년 무렵 일본 도쿄도 서부에 위치한 사이타마현 도호음악대학(東邦音楽大学) 성악부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2년간 전통음악이 아닌 성악 전공에 작곡과 지휘도 배웠다.
안성현이 다녔던 2년제 도호음악대학은 1938년 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개인의 적성과 능력을 고려하여 소수 정예 실기 중심의 수업을 하는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서양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유일한 학교였던 탓에 많은 음악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안성현은 아버지가 있는 함흥이 아닌 자신이 태어난 남평에서 가까운 광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44년부터 1947년 상반기까지 전남공립여자중학교(현 전남여고), 광주사범(현 광주교대), 조선대학교 등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사회생활 첫해인 44년에 장흥군 장평면 등촌마을 출신으로 3살 아래였던 성동월(成東月, 1923~2017)과 결혼하였다.
성동월의 큰어머니와 안성현의 어머니가 친구 사이라서 중매 혼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광주제일고 부근 수기동에서 살림을 차렸는데, 그의 곡 '엄마야 누나야'는 이곳 신혼집에서 창작되었다. 성동월의 회고담에 의하면 안성현은 "예술가로서는 예민했지만 가정에서는 자상하고 따뜻했던 가장"이었다고 한다. 1950년 월북하기까지 성동월과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안우삼은 1945년생으로 광주에서 서석초등학교와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서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에 약대 학생회장을 했었고,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약국을 하였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아들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안지훈은 할머니와 고모의 보살핌 속에 자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딸 안경애는 1949년생으로 안성현이 월북할 당시 돌이 갓 지난 상태였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을 법하다. 광주에서 남평과 목포를 오가며 '안성현 기념 사업' 등 지역 문화 행사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삶을 깨우는 음악
안성현이 광주에서 목포항도공립여중으로 옮긴 시기는 1947년 9월 말이었다. 그는 교장 사택에 기거하면서 곧장 합창단을 꾸리는 등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광주사범학교의 인연으로 그를 알아본 조희관 교장의 배려가 특별하였다.
조희관 교장의 요청이기도 했지만, 대규모 합창단 운영은 그에게 본격적인 실험 무대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엄마야 누나야' 작곡 경험과 목포로 옮기기 전인 1946년 9월 광주 서석초등학교 강당에서 개최한 '작곡 발표회' 이력도 있었다.
목포 생활 1년 만인 1948년 8월 『안성현 작곡집』을 비매품으로 간행(호남신문 1948.8.24. 2면)하였다. 간행 주체가 '목포 안성현 음악연구소'인 것을 보면 개인 비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곡을 완성한 '엄마야 누나야'를 비롯하여, '부용산'(박기동 시), '낙엽'(안성현 작사), '진달래'(박기동 시), '앞날의 꿈'(조희관 시), '내 고향'(조희관 시) 등 10여 곡이 실렸다.
2개월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제1회 전국 학생 합창 경연대회'가 서울 시공관(현 국립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렸다. 문교부와 공보처에서 공동 주관한 것으로 규모가 매우 큰 행사였다. 초등, 중등, 대학부로 나뉘어 10월부터 예선을 거쳐 본선까지 진행되었다.
특등(1위)은 서울사범학교(지휘 이동일), 1등(2위)은 경기공립중학교(지휘 구두희)와 목포항도공립여중(지휘 안성현)이 공동으로 차지하였다. 2등(3위)은 이화여자중학교(지휘 신봉조)였다.
지정곡 '정부 수립 기념가'에 자유곡을 1곡 더했는데, 자유곡은 안막의 시에 안성현이 곡을 붙인 '그리운 강남'이었다는 주장(『목포여고 60년사』)이 있다. 구체적 확증은 없다.
심사위원들로부터 "고도의 3부 합창으로 편곡된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곡, 안성현이 직접 작곡한 독창성과 예술성, 민족적 정서가 승화된 곡, 완벽한 하모니와 지휘"라는 평가를 받았다. 대회가 끝난 후 안성현은 대회 심사위원장이었던 현제명으로부터 자신이 속한 서울대 예술대학 합창 지휘자로 올 것을 권유받기도 했다고 한다.


1949년 9월 15일 목포항도공립여중을 사직한 안성현은 서울 등지를 오가며 활동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는 작곡가나 지휘자로 활동했지만 성악가로서의 기량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1950년 5월에는 모처럼 다시 목포로 돌아와서 '안성현 독창 발표회'를 가졌다. 목포여중 강당, 흔치 않은 무대에서 2년 전 간행했던 『안성현 작곡집』에 수록된 노래 대부분을 소화했다. '부용산', '진달래', '내 고향' 등으로 이어진 레퍼토리 반주는 이 학교 음악교사였던 이득주가 맡았다. 사전에 충분한 교감 혹은 리허설 없이는 불가능한 공연이었을 것이다.
목포사범학교 김재민(金在珉), 목포중 조념(趙念, 작곡 및 바이올린 연주), 목포여중 이득주(李得柱) 그리고 안성현, 그들은 같은 목포권 음악 교사였기에 교류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안성현의 4살 아래였던 1924년생 김재민(곡성 출신, 광주 대성여고 제2대 교장)은 수 차례 안성현과 접촉이 이어졌다. 그 과정을 나주 출신 시인이자 서예가인 김종(전 조선대 국문학과) 교수가 인터뷰(나주투데이 2008.8.22.)로 담았다. 김재민의 아내 역시 목포항도공립여중 1회 학생으로 안성현의 제자였기에 그의 진술은 매우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5월 '안성현 독창 발표회'에서 처음 만나 전쟁 기간이었던 7월에도 조념 등과 더불어 안성현을 몇 차례 더 만났다고 한다. 무안 일로면 농가에 차린 자신의 신혼집에까지 안성현이 찾아왔다고 하니, 꽤 가깝게 지냈던 모양이다. 9월 15일 목포 평화극장에서 진행된 '안성희 무용 발표회' 후 가진 뒤풀이 일화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라서 재구성하여 인용한다.
아다시피, 안성희는 월북 무용수 최승희와 문학평론가 안막 사이 딸로서, 1932년생인 그녀는 당시 18세였다. 인민군 위문 공연 차원으로 진행된 안성희의 공연은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도 꽤 소문난 행사였다. 본 공연 참석은 못 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뒤풀이에 동석한 김재민은 안성희의 바로 옆자리에 자리하게 되었고, 안성현과도 가까운 자리였다. 북에서의 생활을 주제로 안성희와 대화를 나누었으며, 이어 "안성희가 음악회 일로 평양에 가자는데 그럴까 한다."는 얘기를 안성현으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불순한 작가가 된 박기동
일본 유학을 마친 박기동(朴璣東, 1917~2004)은 1943년에 귀국, 벌교남국민학교(현재 벌교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해방을 맞았다. 이때 교가를 작사했다. 1946년 광주 서석국민학교 6개월 근무를 마치고 벌교상업중학교(현 벌교상업고등학교)에서 국어와 영어를 맡았다. 이 학교 교가도 그가 작사한 것이다. 안성현이 작곡을 하였다니, 시기는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된 48년 이후인 듯하다.
일본 유학 시절 간사이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우리말에 대한 애착은 유별났다. 영문학이나 불문학 전공자들이 한글을 매개로 작품 활동을 하는 예도 흔하지만, 근현대 학교 초창기 교가 제작은 대체로 그 학교 교원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1947년 순천사범학교 강사 시절 박기동의 삶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시집가서 아이 하나 낳지 못하고 죽어가는 여동생, 부용산 자락에 그녀를 누이고 내려오면서, 고개 떨구니 잔디만 푸르러 푸르르고, 하늘을 보니 또 서럽게 푸르러 푸르렀다. 별다른 작정 없이 남조선교육자협회에 가입했더니 좌파 교육운동가로 몰려 4개월 구금을 당했다가 순천사범학교부터 6개월 정직을 받기도 했다.
목포항도공립여중 조희관 교장의 부름을 받은 것은 이듬해 2월이었다. 조 교장은 개교 초창기 학교상을 정립하기 위해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곤 하였는데, 국어과 안성현이 먼저 와 있었다.
1948년 4월 한반도의 남쪽은 혼란스러웠다. 미군정과 합세한 이승만 계열이 주도하는 5.10 선거를 앞두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 통일 정부 수립 욕구가 분출하고 있었다. 더구나 제주도에서는 4월 3일을 시작으로 군경 등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과 학살이 끔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4월 19일, 남쪽의 김구, 김규식 등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했다. 김일성, 김두봉 등 북측 인사를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길이었다.
밤중이라도 어서 가야지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어서 가야지
산맥을 넘고 강물을 건너
어둠이 앞을 막아도 나는 가야지
발등에 불을 켜고 가야지
가다가 쓰러져 눈을 감아도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은 가야지
아침이 오면 눈부신 해가 뜰 텐데
밤중이라도 어서 가야지
새벽종 소리 들릴 때까지
쉬지 말고 어서 가야지
'밤중이라도 어서 가야지', 박기동의 이 시는 평양으로 떠나는 남측 대표단을 마음으로나마 배웅하려고 지은 헌시였다. 목포항도공립여중 근무 중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는 또 경찰에 끌려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남북 협상의 결과 '외국 군대의 즉각 철수', '내전 방지', '전조선 정치회의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 등에 합의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박기동의 생애처럼 점점 더 얽히고 또 설켰다.
시대의 염원을 담은 그의 또 다른 시 '부탁이야'는 비서진을 통해 방북길 김구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가시거든 다시는 오지 마시라
아예 그곳에서 사시라
가서 삼천리에 불을 밝히고
오지 마시라
님께서 가신 그 길이
마지막 굽이가 되게 하시고
다시는 이 길을
누구도 걷지 않게 하시라
가시거든 님께서만 가시지 말고
삼팔선도 아주 데리고 가시라
가서 영영 오지 마시라
부탁이야

그는 1957년 목포사범학교를 그만두었으며, 1961년에는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1980년대 군사정권 시대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감시, 가택 수색, 연행과 구금이 이어졌다. 새가 노래를 하지 못하듯 시인이 시를 쓸 수 없는 질식 상태였다. 겨우 쓴 원고는 사찰 요원에 의해 탈취당했다.
신태양사, 삼중당, 휘문사 등 출판사를 전전하며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 『빙점』, 『길은 여기에』, 『양치는 언덕』 등을 번역하고 편집일을 한 것 외에 특별히 시집을 내거나 하지는 못했다. 1982년 부인 김영순과 사별하기에 이르자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표현대로 '사방이 벽'이었을 것이다.

#사라진 1회 졸업생 배금순
1949년 5월 8일 호남신문사에서 주최한 '호남 남녀 성악 콩쿨대회'는 발 디딜 틈 없이 성황(1949.5.11. 호남신문)이었다. 목포극장에서 진행된 이 콩쿨에서 익히 알려진 목포항도공립여중 5학년 배금순이 중등부 1위를 차지하였다. 2등은 박동균(목포상업중), 3등에는 박금규(숭일중)였다. 한편 초등부에서는 북교국민학교 4학년 김용남이 돋보였는데, 김용남과 배금순은 천재적인 솜씨라며 칭찬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러니까 배금순은 당시 목포에서 노래 잘하기로는 인기 절정이었다.
표정이 밝고 노래 잘하던 배금순은 1930년 11월 출생이니 1950년 5월 졸업 당시 20세였다. 음악과에 입학하였노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이후 그녀의 행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목포와 무안지역 보도연맹원들은 예비검속 대상자로 분류되어 철저하게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엄혹한 전쟁 통에 지역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직접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는데, 그 결과 무안경찰서, 목포형무소 등에 구금되었다.
이들 중 254명이 1950년 7월 23일 이전까지 신안군 비금면 인근 해상까지 실려 가 군경에 의해 집단 살해되었다. 수장을 당한 것이다. 남북 분단과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반정부 성향의 지식인들도 있었지만 단순히 혈기 넘치는 학인(학생)이나 청년들도 많았다.
배금순의 아버지 배성기(裵聖基)의 거주지는 무안 일로면 월암리이다. 배금순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진실화해위 제1기 조사보고서(전남 목포·무안·신안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2009)에 따르면 '일로면 지역 희생자 조사' 항목에 배금순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당시 일로면에서 배금순, 이명옥 등 보도연맹원들이 일로지석소(파출소)에 집결한 뒤 무안경찰서를 거쳐 목포경찰서로 이송되었다는 기록이다.
목격자의 증언 중에는 "일로면 지석소 마당에 수십 명의 청년이 굴줄(새끼줄)에 묶여 대기하고 있었으며, 그중에 '목소리 곱고 공부 많이 한 배금순'이 섞여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더는, 배금순의 고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
동생과의 사별, 그 가슴 절절한 심정으로 박기동이 '부용산'을 지은 것은 1947년이다. 습작 노트를 소지하고 목포항도공립여중에 부임한 시기는 48년 2월이다. 그해 8월 안성현은 박기동의 습작시를 다듬고 곡을 붙여 『안성현 작곡집』에 실었다. 즉, 노래 '부용산'은 이미 1948년 8월 이전에 이 세상에 이미 나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노래 '부용산'에 관련된 제3의 인물, 문학소녀 김정희의 사망일은 같은 해 10월 10일이다. 1년 선배였던 배금순이 처음 '부용산'을 노래함으로써 일반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은 48년 4월 11일, 목포항도공립여중 종업식을 1개월 앞둔 학년말 예술제 무대였다고 한다. 당시 배금순은 5학년이었다고 하니 부용산을 처음 부른 시기는 1949년 4월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추론은 여기까지이다.
노래 '부용산' 연대기, 뭔가 아귀가 맞지 않은 면이 있다. 어디서 이야기 타래가 꼬인 것일까. 벌교 부용산에서 목포항도공립여중까지 4년, 오랜 탐사와 추적의 글을 정연하고 개운하게 끝내지 못해 못내 아쉽다.
교육과 성장은 혼자의 힘이 아니다. 볼을 스치는 바람, 등을 다독이는 햇살도 스승이 되려니 생각하고 있다. 조희관 교장, 박기동, 안상현 등 널리 알려진 인물들의 역할도 중요하였겠지만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오새옥, 이소암, 김종률, 주찬애 선생님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분들의 순수 열정과 수고로움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교육이었음을 명시하면서,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