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 로마 교황과 맞선 페이팔·팔란티어 공동 창업자 피터 틸 | ‘AI 규제론자=적그리스도’ 경고 피터 틸… 교황 주장과 대치

이신혜 기자 2026. 3. 2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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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란티어 로고. /사진 셔터스톡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Palantir Technologies·이하 팔란티어) 창업자 피터 틸(Peter Thiel)이 이탈리아 로마에서 ‘적그리스도(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거나 부인하는 자를 가리키는 용어)’ 강연으로 사상 최초 미국인 교황인 레오 14세에게 도전했다.”

3월 16일(이하 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청중과 강연 장소까지 비밀에 부쳐지고 휴대폰과 녹음기까지 불허된 로마 강연장에서 틸이 적그리스도 도래를 경고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AP통신에 따르면, 틸의 3월 13일 로마 바티칸 인근 비공개 강연 내용은 지난해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행한 비공개 강연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리콘밸리 투자자이자 페이팔과 팔란티어 공동 창업자인 틸은 인공지능(AI), 기후 위기, 핵전쟁 같은 ‘존재론적 위기’에 대한 공포가 커질수록 이를 해결하겠다는 명분으로 세계 권력이 하나로 통합된 체제, 즉 ‘하나의 세계 국가(one-world state)’가 등장할 수 있다며 적그리스도는 사람에게 ‘평화와 안전’을 약속하며 등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체제가 인류에게 평화를 약속하지만 결국 자유와 혁신을 억압하는 현대판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게 틸 주장이다.

그는 인류가 서로를 모방하는 경쟁 구조에 갇혀 혁신을 멈추면, 기술 발전이 정체된 상태에서 거대한 정치·기술 권력이 등장해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FT는 AI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관련 리스크 최소화를 위해 강한 규제를 촉구해 온 레오 14세 입장과 뚜렷이 대비된다고 풀이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가장 성공한 투자자이자,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후원자이며 J.D. 밴스 미국 부통령의 정치적 후견인인 틸의 적그리스도 발언은 단순한 신학적 관심이 아니라 기술 발전의 방향, 세계 권력 구조 그리고 그가 주장해 온 ‘독점(monopoly)’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피터 틸의 저서 ‘제로 투 원’. /사진 셔터스톡

“모방 경쟁 레드오션 피해야”… 독점 철학 탄생

틸 세계관은 그의 개인사에서 비롯됐다. 1967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을 졸업한 뒤 월가 로펌과 투자은행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는 금융업에서 경험한 치열한 경쟁이 인간을 창조적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모방하는 존재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2015년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문화평론가이자,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가 강조한 인류의 ‘모방 욕망(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흉내 낸다)’과 ‘희생양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다. 인류는 구성원 간 모방 욕망으로 인한 갈등과 폭력으로 위기에 놓이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무고한 약자와 소수자를 희생양 삼아 위기를 벗어나 왔다는 게 지라르 주장이다. 틸은 스탠퍼드대 재학 시절 지라르를 접했고, 이후 그를 철학적 아버지로 받든 것으로 전해진다. 틸은 이를 계기로 레드오션(모방)을 피해 아무도 하지 않는 영역(독점)으로 가야 한다는 세계관을 고착화했다.

틸은 1998년 온라인 결제 기업 페이팔(PayPal)을 창업하며 자기 철학을 현실로 옮겼다. 그는 벤처 투자자로 변신해 타인의 욕망을 모방하려는 인류의 모습을 담은 페이스북 등 여러 기업에 초기 투자했다. 2014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경쟁은 패배자를 위한 것(Competition is for losers)”이라는 문장으로 틸의 저서 ‘제로 투 원(Zero to One)’ 을 소개했다. 틸은 기업이 성공하려면 모방으로 인한 경쟁을 피하고 독점적인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엔비디아 전량 매도… 팔란티어에 집중

최근 투자 행보에서도 틸의 철학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틸이 운용하는 마크로(Macro) 헤지펀드는 2025년 3분기 보유 중이던 엔비디아(NVIDIA) 주식 53만7742주(약 1억달러)를 전량 매도했다.

AI 반도체 시장이 세계 투자자의 관심을 끌던 시기였지만, 틸은 이를 ‘모방적 광기’가 만든 거품으로 판단했다는 분석이 시장에서 나왔다. 대신 그는 공동 창업한 국방·안보 특화 데이터 분석 기업 팔란티어에 집중했다.

팔란티어는 단순한 데이터 분석 기업이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안보 시스템을 구축하는 플랫폼을 목표로 한다. 팔란티어의 핵심 제품(고담·아폴로 등)은 방대한 비정형 데이터를 통합·시각화하고 실시간 의사 결정, 위협 탐지, 표적 식별 등에 활용되도록 설계돼 있어, 국방·정보 분야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팔란티어는 2025년 미 육군과 향후 10년간 최대 약 100억달러(약 14조9000억원) 규모의 차세대 전장 관리 시스템 조달 계약을 체결했다.

틸은 AI 기술이 소비자 서비스보다 국방· 우주·에너지 같은 ‘물리적 산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본다.

(왼쪽부터) 피터 틸 팔란티어 공동 창업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J.D. 밴스 미국 부통령. /사진 셔터스톡 AI

‘킹메이커’ 틸과 밴스

틸의 영향력은 기술 산업을 넘어 정치권에도 확장되고 있다. 특히 밴스와 관계는 그의 정치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두 사람 인연은 2011년 시작됐다. 당시 예일대 로스쿨 학생이던 밴스는 틸의 강연을 들었다. 틸은 이 강연에서 미국 사회가 의미 있는 기술혁신 대신 명문 직장과 지위 경쟁에 몰두하고 있으며, 그 결과 사회 전반에 ‘기술 정체’가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법조계·금융권 같은 엘리트 직업을 향한 과도한 경쟁이 젊은 인재를 소모적인 경력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했다.

밴스는 훗날 가톨릭계 잡지 ‘더 램프(The Lamp)’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그의 강연은 내가 예일대 로스쿨에 다니며 경험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강연을 계기로 엘리트 직업 경쟁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실리콘밸리와 벤처 투자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밴스는 2016년 틸이 공동 창업한 벤처 투자사 미스릴 캐피털(Mithril Capital)에 합류하며 실리콘밸리에서 투자 경력을 시작했다. 틸은 이후 밴스의 사업과 정치 활동에도 주요 후원자로 이름을 올렸는데, 2022년 밴스가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틸은 약 1500만달러(약 223억원)를 후원했다. 이후 밴스가 미국 부통령직에 오르면서 틸은 실리콘밸리와 워싱턴 D.C.를 연결하는 핵심 인물로 평가받았다. 틸이 밴스를 통해 실리콘밸리의 진보적 가치관에 대응하는 ‘포스트 리버럴(Post-liberal·후기자유주의)’ 보수 정치철학을 확산했다는 평도 나온다.

“제로 투 원, 0에서 1로 가는 용기”

틸이 로마 강연에서 강조한 메시지는 단순하다. 인간이 서로를 모방하는 경쟁 구조에 갇히면 진정한 혁신은 사라지고 기술 발전은 멈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는 안정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통제 시스템에 익숙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틸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받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술과 정치 질서를 설계하는 사상가로도 주목받고 있다. 로마에서 말한 그의 ‘종말론적 경고’는 기술과 권력이 결합한 미래 세계에 대한 고민으로도 읽힌다.

틸은 실리콘밸리에서 ‘페이팔 마피아(PayPal Mafia)’ 대부로 꼽힌다. 페이팔 출신 창업자와 투자자가 이후 테슬라·링크드인·유튜브·스페이스X 등 수많은 기업을 만들며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틸은 벤처캐피털 파운더스 펀드(Founders Fund)를 공동 창업해 페이스북·스페이스X·에어비앤비 등에 초기 투자했다. 특히 2004년 페이스북에 약 50만달러(약 7억원)를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거둔 것은 벤처 투자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투자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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