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은밀한 암살자, 다리 수술 후 찾아온 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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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위험 신호를 보면 뇌와 심장이 격렬한 경고를 보낸다면, 폐는 매우 은밀하고 정숙하게 다가와 생명을 위협한다.
78세 여성 환자는 2주 전 빙판길 낙상으로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폐렴이나 심부전 등 일반적인 호흡기 질환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모호한 상황이었으나, 환자의 과거 병력과 하지 상태에 주목했다.
결국 할머니의 하지에서 발생한 거대한 혈전은 심장을 거쳐 폐로 향하는 주혈관인 폐동맥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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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위험 신호를 보면 뇌와 심장이 격렬한 경고를 보낸다면, 폐는 매우 은밀하고 정숙하게 다가와 생명을 위협한다. 78세 여성 환자는 2주 전 빙판길 낙상으로 고관절 골절 수술을 받은 이력이 있었다. 수술 경과는 양호했으나,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장기간 침상에 누워 지내며 거동이 제한된 상태였다.
사건은 오늘 아침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 호소와 함께 시작되었다. 환자는 가슴의 답답함과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을 토로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보호자들은 단순한 천식 증상으로 오인하여 구급차를 호출했으나, 응급실 도착 당시 환자의 산소포화도는 정상 범위를 훨씬 밑도는 79%까지 급락해 있었다.
청진을 통해 확인한 심박동과 호흡음은 지극히 정상이었으며, 엑스레이와 심전도 검사 결과 또한 특이 소견이 없었다. 폐렴이나 심부전 등 일반적인 호흡기 질환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 모호한 상황이었으나, 환자의 과거 병력과 하지 상태에 주목했다. 수술 후 통증으로 인해 장기간 침상에 머물며 거동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환자의 하지 상태를 확인한 결과, 수술 부위 다리가 반대편에 비해 현저히 부어 있었으며 종아리 압박 시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이는 심부정맥 혈전증(DVT)의 증상이었다. 우리 몸의 혈액은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해야 하지만, 수술 후 장기간 부동 상태로 누워 있으면 하지 정맥의 혈류가 고여 응고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생성된 혈전은 환자가 거동을 시작하는 순간 혈관을 이탈하여 혈류를 타고 이동한다. 결국 할머니의 하지에서 발생한 거대한 혈전은 심장을 거쳐 폐로 향하는 주혈관인 폐동맥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진단명은 폐색전증(Pulmonary Thromboembolism, PTE)이었다. 이는 좁은 좌석에 장시간 머물 때 발생하는 이른바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의 병원 판이자, 가장 치명적인 형태에 해당한다. 폐혈관이 막히면서 환자가 아무리 거칠게 호흡해도 산소가 혈액으로 공급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는 생리적으로 물속에 잠긴 것과 다름없는 질식 상태를 의미한다.
즉각 CT 검사를 시행한 결과, 예상대로 양측 폐로 이어지는 거대한 폐동맥 줄기가 검은 혈전 덩어리에 의해 완전히 막혀 있었다. 지체할 수 없는 초응급 상황임을 인지하고, 혈액의 응고를 막고 이미 생성된 혈전을 관리하기 위해 즉시 항응고제인 헤파린 투여를 결정했다. 즉시 고용량의 항응고제를 투여하자 단단하게 굳어 있던 혈전들이 용해되기 시작했다. 마치 막혔던 댐이 허물어지듯 폐혈관으로 다시 혈류가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투약 30분 뒤, 환자의 산소포화도는 95%로 회복되었으며 가쁘던 호흡 또한 눈에 띄게 편안해졌다.
다리 수술 부위와 폐의 연관성을 의아해하는 보호자에게 인체의 모든 조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했다. 고인 물이 부패하듯 흐르지 못하고 정체된 혈액은 결국 응고되어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폐색전증은 진단이 지연될 경우 사망률이 30%에 육박하는 치명적인 질환이다. 오직 의료진의 신속한 추론과 결단만이 골든타임을 확보하는 유일한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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