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따라 목숨 버린 과부의 진심을 무시했다, 연암 박지원은 왜?

최다원 2026. 3. 2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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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역사 속 여자, ○○하다' 시리즈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대덕리에 위치한 '함양 열녀 밀양박씨 정려비'. 국가유산청

시계를 약 230년 전으로 돌려본다. 정조 17년이던 1793년, 연암 박지원이 현감으로 있던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 22세 과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전 집안 출신 박씨로, 신랑 될 사람이 폐병 환자임을 알면서도 혼사를 치른 직후 남편을 잃었다. 이후 "개가 들라"는 양가의 권유를 거부하고 시집에 머물다가 남편 삼년상을 마치는 날 독을 삼켰다.

갓 스물을 넘긴 청춘이 말 한 번 제대로 섞은 적 없는 남편을 따라 세상을 등지다니. 사대부 여인이야 법령에 의해 재혼이 사실상 금지됐었다지만, 박씨는 중인 계층이었다. 박지원은 박씨를 '열녀'로 칭송하는 분위기가 퍽 탐탁지 않았던지, 자신의 책에서 그가 자진한 이유를 '주변의 동정이나 받는 처지가 되는 게 싫어서'라고 추정했다.

그렇게 넘겨짚을 일이 아니었다. 박씨는 유서를 통해 지아비에 대한 의리, 즉 '순수한 도덕적 열정'을 결단 이유로 들었다. 당시는 과부를 노린 성범죄가 만연하게 벌어지곤 했다. 정절을 지키기가 어려웠단 얘기다. 그가 어릴 때부터 열녀와 같은 위인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런데도 박지원은 남편상을 치르고 숨진 사대부 여인의 행실은 찬양하면서, 박씨에 대해서는 "지나치다"며 본관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왜 박씨의 진심을 의심했을까?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교수는 하층 여성들의 주체성이 수면 아래에서 끓어오르던 조선 후기 시대상에 주목한다. 권력 체제의 균열에 직면한 사대부 남성들이 진정 위기라고 생각했던 지점은 '하층민의 정동(情動)'일 수 있다는 것.

역사 속 여자, ○○하다 시리즈·장지연 등 지음·푸른역사 발행·총 4권·총 4만2,900원

장 교수를 위시한 사학자 7명이 낸 '역사 속 여자, OO하다' 시리즈는 박씨 이야기를 포함해 여성의 행위 주체성에 초점을 맞춘 9편의 글을 4권으로 묶은 것이다. 기록·욕망·결단·생존 순서다. 장 교수는 "여성사 연구자들이 봉착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여성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상류층 남성과 가부장적 국가에 의한 사료를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기획의 변을 밝혔다.

주로 역사의 단역·조연이었던 여성들의 사연을 좀 더 쉽고 널리 전달하고자 저자들은 사료를 기반으로 허구적 서술을 동원하기도 한다. 1175년 고려 의종의 차녀인 안정궁주가 천한 신분 취급받던 악공과 간통을 저지른 일화를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처럼 써내려 가는 식이다. 이를 통해 근친혼을 고집하던 왕실 덕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왕녀들의 삶을 설명한다.

여성의 의지를 독해하는 방법도 소개한다. 일례로 고려 후기 여성 조씨는 당대 문관 이곡의 글에서 집안을 일으킨 절부로 나온다. 당시 사회상에 비춰 보면 원 조정에 입성하게 된 이곡이 고려인으로서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 사실을 다소 편집했을 개연성이 있다. 저자들은 이곡이 조씨 손녀사위의 친구였다는 점을 짚으며, 이곡을 통해 자기 삶이 일부나마 기억되길 바랐던 조씨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의 기록 속에서 흐릿하게 다뤄졌던 여성의 일터는 제4권에서 집중 조명한다. 일제강점기 농가의 몰락이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넘쳐나는 고학력 남성 실업자 대신 가정의 생계를 지탱했던 건 향촌 출신 식모들. 일본인 밑에서 갖은 수모를 견뎌내며 착실히 월급을 벌어오는 그들에게 사회는 때때로 '불온'의 이미지를 뒤집어씌웠고 인신매매의 희생양으로 내몰기도 했다.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조선인을 다룬 신문 만평. 동아일보 1933년 9월 10일 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제 2026년 3월로 돌아오자. 3·8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해 7일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최말자씨가 연단에 올랐다. 1964년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는 이유로 징역형 집행유예를 받았던 그는 지난해 재심에서 61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포기하지 않는 여성의 행동이 판례를 바꾼 사례였다. 최씨는 이날 "어제는 오늘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여성의 달 끝자락인 이번 주 또 다른 신간으로 김경연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 여성 비평가 20명이 일상에서 접하는 텍스트를 빌려 '마녀'와 '광녀'로 불리는 여성들의 탄생 과정을 해부한 '마녀의 독서, 광녀의 춤'(오월의봄 발행)이 나왔다. 1977년 독일에서 출간된 이래 오늘날까지 페미니즘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클라우스 테벨라이트의 '남성 판타지'(글항아리 발행)도 번역 출간됐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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