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양산 난닝구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초보기자의 거침없이 하이킹]

남준식 기자 2026. 3. 2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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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산

산에서 만난 인연은 실로 특별하다. 그 우연한 만남을 놓치지 않고자 초보기자가 발을 벗고 나섰다. '거침없이 하이킹'은 산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과 함께 걷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코너다. 산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다가가 그들의 등산 이야기를 듣고 전하고자 한다. 산이 맺어 준 우연한 만남과 등산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상건(51)

인천 계양구

"그림 그리는 건축가랍니다"

앞서 세 번의 인터뷰를 연달아 퇴짜 맞고 산림욕장을 떠나려던 차, 저만치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중년의 남성. 커다란 DSLR 카메라를 든 모습에서 전문가의 포스가 물씬 풍겼다. "일상 풍경도 새롭게 보려고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는 그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나뭇잎과 나무껍질의 질감을 사진으로 남기는 20년차 건축설계사다.

현재 대학병원을 설계 중인 그는 "건축은 스트레스가 참 많은 일"이라며 웃는다. 본인이 하고 싶은 것보다는 건축주의 요구를 이끌어내야 하고, 예산과 법규 등 제한사항과 매번 바뀌는 현장 여건에 시달리기 일쑤라고. 그 머리 아픈 고민들을 비워내려 그는 산을 찾는다. 가방 안 작은 스케치북에는 계양산을 비롯한 스케치들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정성껏 채운 스케치북

서윤희(28)·서석진(26)

인천 부평구·연수구

"우리 커플 아닌데요!"

다정하게 내려오는 커플을 붙잡자 "우리 커플 아닌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포항이 고향인 두 사람은 일 때문에 인천으로 올라와 타향살이 중인 남매지간. 평소 동생이 산에 가자고 할 땐 '타이밍'이 안 맞더니, 새해 계획을 세우던 누나가 먼저 동생에게 산에 가자고 했다.

누나 서윤희씨는 대학병원 중환자실 5년차 간호사다. "간호사는 힘들기도 하고 보람도 있는 직업"이라며 "3교대로 일하면서 처음엔 힘들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말한다. 의식 없는 사람들의 연명 치료에 대해 고민하기도 하지만 결국 건강을 되찾아 퇴원하는 환자를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동생 서석진씨 역시 송도에 있는 바이오제약기업에서 4조 2교대로 근무하며 치열하게 살고 있다. 모처럼 '타이밍'을 맞춘 남매는 부모님을 모시고 곧 일본 삿포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가족여행을 위해 장만한 카메라

김진수·황재원(26)

인천 계양구

"계양산 기운, 합격까지 이어지길!"

초등학교 때부터 우정을 이어온 단짝. "고등학교 토론 동아리에서 만나 불꽃 튀는 토론을 벌이다 친해진 사이"로, 대학 전공도 각각 사회학과와 사회교육과로 닮은꼴이다. 사회학도이자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은 김진수씨는 외무영사직 7급 합격 후 외교부 발령을 기다는 중이고, 예비 교사인 황재원씨는 임용고시 합격 발표를 코앞에 두고 있다. "붙을 것 같냐"는 질문에 쑥스럽게 웃는 두 청년에게 "월간 <산>을 만났으니 반드시 합격할 것"이라며 행운을 빌었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스타일을 포기할 수 없는 명품 선글라스

정수빈·김민채·오서현·옥정윤(19)

인천 계양구

"패션도 포즈도 끝내주죠?"

형형색색의 두건을 두르고 잠자리 선글라스를 쓴 정체불명의 사람들. 수능 끝난 해방감을 만끽하러 계양산에 놀러 온 계산여고 4인방은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한사랑산악회'를 방불케 하는 비주얼에 구수한 트로트 가락까지 곁들였다. "분명 드레스코드를 맞추기로 했는데 서로 이해한 게 달랐나 봐요"라며 까르르 웃었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네 친구의 시끌벅적한 우정

박경은(53)

인천 서구

"마감 끝나면 하체부터 조집니다"

"앉아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보니까 운동하러 산에 온다"는 그녀의 직업은 만화가다. 주로 그리는 것은 어린이 대상 학습 만화. 포털 사이트에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니 프로필이 나온다. SNS에는 귀여운 캐릭터들이 와글와글하고, '#하체 조지기'라는 화끈한 해시태그와 함께 얼마 전 다녀 온 계양산 사진도 있다. 오늘도 마감을 끝내고 늦은 오후에 계양산을 찾았다. 이른바 '계단산'이라 불리는 계양산을 왕복 1시간 정도 가볍게 산행하는 그녀에게 산은 최고의 마감 후 보상이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휴대폰 속 마감의 흔적들

이수원·류반규·이강복(67)

인천·김포·서울

"한산 모시 알쥬? 거기가 고향이유"

초중고 동창인 세 남자. 한산 모시로 유명한 충남 서천이 고향이다. 각자 교사, 감사원, 경찰로 공직 생활을 마치고 모처럼 고향 친구들과 시간을 맞춰 산에 올랐다. 세 사람의 입담이 워낙 좋아 '최애 산'을 하나씩 꼽아 달라고 요청했다. 캠핑카 세계일주 7년차인 전직 교사 이수원씨는 12폭포가 있는 포항 내연산을, 한때 제주에 발령 받아 한라산을 수십 번 올랐다는 전직 경찰 이강복씨는 상고대 핀 겨울 한라산을, "파타고니아 트레킹 갔다가 선택관광비 70만 원씩 내는 게 아까웠다"는 전직 감사원 류반규씨는 코스 다양하고 가성비 좋은 북한산을 꼽았다. "인간이 만든 어떤 기구보다도 산이 건강에 최고"라며 당뇨와 고지혈증까지 극복했다는 그들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누구 것이 더 좋은지 경쟁 붙은 등산스틱

이홍성·정해영(58)

고양 덕양구

"죽을 고생 해보면 바리바리 싸들게 돼죠"

직장동료이자 둘도 없는 산행 메이트다. 직장이 있는 부천과 가깝다 보니 계양산에 종종 온다. "4년에 걸쳐 치악산의 모든 코스를 섭렵했다"는 두 사람은 눈 내린 다음날 치악산에 올라가서 내려올 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은 채 새하얀 눈밭을 밟았던 기억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인공구조물 없이 바위를 밟는 맛 때문에 치악산을 사랑한다는 그들은 근처 안흥찐빵 가게를 낱낱이 꿰고 있는 미식가들이기도 하다. "낮은 계양산에 웬 커다란 배낭이냐"는 물음에, 겨울 산을 좋아해서 겨울 짐을 빼기 귀찮기도 하거니와, "한 번씩 죽을 고생 해보면 바리바리 싸들게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오늘 처음 개시한 블루투스 스피커

남수연(35)·미가(27)

서울 동작구·서대문구

"으, 추워라. 몽골보다 더 춥네요"

몽골에서 온 유학생 콤비다. 남수연씨는 경영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8년째 인사조직을 공부 중인 예비 교수님이고, 미가씨는 한국 드라마와 방탄소년단이 좋아 한국에 온 정치외교학과 석사 대학원생이다. 18세 때 부모님 없이 혼자 와서 알바하면서 공부하느라 힘들었지만 한국에서의 삶이 즐겁단다. 영하 10℃의 추위에 "몽골 날씨에 비하면 안 춥지 않냐"고 묻자 "한국이 더 춥다"며 손사래를 치는 그들. 몽골에는 일 년에 한두 번씩 간다며, 몽골 여행은 나담축제가 열리는 7월이 최고라는 팁을 건넸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편의점에서 산 1+1 보리차

엄영섭(71)·허윤범(8)

인천 계양구

"융프라우 컵라면 부럽지 않아요"

육개장 컵라면을 '호호' 불고 있는 꼬마와 그를 지긋이 바라보는 할머니. 계양산 정상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할머니와 손자에게 다가갔다. 계양구에서 40년을 산 엄영섭씨는 대통령기 전국등산대회에도 참가했던 베테랑 산꾼이다. 맞벌이하는 자녀를 대신해 손자를 봐주며 아기 때부터 계양산으로 데리고 다녔다고. 저 아래 계양산장미원 근처만 맴돌던 아이가 어느덧 자라 할머니와 함께 정상까지 올라왔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사랑이 담긴 할머니표 도시락

하은찬(31)

인천 남동구

"등산엔 역시 양갱이죠!"

양갱 하나를 손에 꼭 쥐고 계단을 내려오는 청년. 그는 건물의 벽과 바닥을 책임지는 타일공이다. 요즘 같이 추운 겨울은 비수기라, 일감이 없는 날을 이용해 산을 찾았다. 하는 일은 어떠냐고 묻자 그는 그저 "재밌다"는 한마디로 일관했다. 묵묵히 제 자리에 타일을 붙이듯 산을 타는 그의 뒷모습이 단단해 보였다.

가방에 뭐 들었어요? 든든한 에너지원, 연양갱

계양산 난닝구 할아버지(78)

인천 서구

"그냥 '인간'이라 불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양산을 뛰어다니는 할아버지가 있다. 사람들은 그를 '계양산 난닝구 할아버지'라 부른다. 이날 기온은 영하 10℃. 한겨울에도 러닝셔츠 한 장 차림으로 계양산 정상을 수차례 오르내린다.

"처음부터 세게 뛰면 못 올라가. 처음 한 번은 살금살금 뛰고, 두 번째에 남은 힘으로 올라야 해."

나이는 78세. 쉰 살이 넘어서 도시가스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 산에 가게 됐다. 개인 사업하며 하지정맥도 있었는데 산에 다니면서 저절로 나았다고 한다. 62세부터 계양산을 올랐다는 그는 한때 매일 계양산을 올랐지만, 지금은 이틀에 한 번꼴로 오른다.

"일흔여섯에 건강 생각하고 다 때려치웠어. 100살까지 산다 해도 24년밖에 못 사는데 건강 챙겨야지."

원래는 과일을 밭떼기로 사다가 도매로 팔았다. 그때도 건강을 가장 큰 가치로 여겨 무농약 친환경 사과만 팔았다고 한다.

"메뉴판에 가격도 적었지만, 가게 앞에 '천금 주고도 못 사는 건강, 아무거나 먹을 수 없다'고 써 붙였어."

성함을 여쭤보자 "그냥 인간이라고 불러! 이름까지 무엇에 써먹어? 안 그래도 사람들이 계양산 난닝구 할아버지라고 부르대"라며 쿨하게 답했다. 이내 계단 여덟 칸을 한 번에 폴짝 뛰어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진정한 도인의 풍모가 느껴졌다.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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