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3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황지윤 기자 2026. 3. 2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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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7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 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작년 12월과 올해 1월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3월 독회 추천작은 김유나 소설집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창비)과 반수연 소설집 ‘파트타임 여행자’(문학동네)입니다. 반수연의 작품은 작년 9월 출간작이지만, 뒤늦게 본심에 합류했습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로우스튜디오서울
/창비
소설가 반수연이 2021년 6월 24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사를 찾았다./김연정 객원기자
/문학동네

정명교·문학평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응집된 묘사와 못에 걸려 찢어진 바지 같은 결말

괴로움은 쌓여만 가고, 파국은 언젠가 닥친다. 주인공은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라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치밀히 계산하고 신중하게 행동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계획은 빈번히 좌절당한다. 왜냐하면 내가 조심스럽게 옮겨 놓고자 하는 대상이 또한 살아 있는 생물이고 나의 의사에 반해 제멋대로 행동하여서, 나의 의도와 충돌하는 다른 사건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대상은 한 개체이다. 주인공도 한 개체이다.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관여적이지 않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약간의 속도 조절에 기능할 뿐이다. 즉 여타 인물들은 거의 무의지적으로 행동하는 사물에 가깝다. 요컨대 김유나의 소설집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창비, 2026.01)에 수록된 작품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단편소설의 일반적인 구도(이것을 소설 일반의 기본 구도로 보는 20세기의 이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장편 소설은 ‘세계들의 대결’이지 ‘자아/세계’의 대립에 근거하지 않는다)를 두 개인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압축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압축의 효과가 있다. 사건 전개에 대한 묘사가 매우 조밀하고 정확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시시각각의 마음의 움직임을 핍진하게 전달한다.

가령 다음 대목을 읽어보자.

부모도 아니건만,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함께 버려졌다는 생각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나는 현권의 행동에 자주 노심초사했다. 현권은 보통 사람들의 기준으로 멀쩡한 구석이 그다지 많지 않은 아이였다. 약시로 태어난 왼쪽 눈은 이십 대 초반에 이미 시력이 측정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틱‘이라는 말을 내가 알기 훨씬 전부터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말을 더듬는 증상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이래로 학창 시절 내내 심각한 학습 부진아 판정을 받았다. 늦된 아이, 늘 저만치 뒤에 있는 아이,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하는 아이. 현권의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소아 정신과 치료를 권유했지만,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내 아들이 그럴 리 없다는 말로 무시했다. 겨우 세 살 위인 내가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교무실로 달려가 현권의 담임 선생님을 찾았고, 드라마에서 봤던 학부형을 연기하듯 어린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현권에 대해 설명했다. 눈이 안 좋아서 앞자리에 앉아야 하고요, 자꾸 딴짓을 하는데 너무 혼을 내면 학교에 안 가려고 하니 이해 좀 부탁드려요. 알림장을 잘 쓰는지 살펴주세요. 현권의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에게 “얘, 너나 잘해”라는 말을 들은 것이 내겐 아직까지도 수치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름 없는 마음」, pp.19-20)

미숙아인 동생의 보호자를 본능적으로 자임한 주인공의 행위가 정밀한 논리를 타고 급류처럼 흘러간다. 행위의 이유, 양태, 반응, 남은 앙금 등이 빠짐없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복수의 마침표를 통해 문장이 나뉘어 있지만, 거의 하나의 문장처럼 읽힌다. 동생의 이름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모두 ‘현권’이라는 실명으로 가리켰다. 그 덕분에 ‘나’와 동생 사이의 관계에 팽팽한 장력이 일렁인다. 이 젊은 소설가가 아주 많은 시간을 들여 묘사 훈련에 집중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약점도 있다. 초점이 응집된 탓에 정황이 좁아지고, 그 바깥으로의 탈출이 어렵게 되었다. 결말 부분들은 웬 UFO가 갑자기 날아들어 툭 던지고 간 엉뚱한 물건을 집어든 느낌이다. 혹은 아주 조심스럽게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툭 튀어나온 못에 바지가 찢겨 벌어진 것 같다. 「물이 가는 곳」은 예외이다. ’하윤‘의 행동은 ’김기왕‘의 행위에 정확히 조응하며 반전에 성공하고 있다. 다른 작품들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탄탄한 기초를 믿기로 한다. 이 작가의 장래에는 쇠털처럼 많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파트타임 여행자

머물 곳이 없어도 삶은 계속된다

반수연의 『파트타임 여행자』(문학동네, 2025.09)에 수록된 소설들은 모두 이민자들의 부랑(浮浪)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소설들이 드물었던 건 아니다. 1903년 하와이 이민 이래 한국인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간 일화는 수도 없이 많고 그 사연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때마다 그 경험과 애환에 관한 소설들이 씌어졌다.

어떤 기록이든 상상의 모험이 깃든 작품은 희망의 주먹질이다. 상상은 꿈, 즉 현실에 대한 보상 장치다. 따라서 그 경험이 얼마나 가혹하든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은 경험에 대한 반항이자 다른 경험의 발판을 구축하는 일이다.

그 점에서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문학이 ‘살아냄’의 양상 아래 펼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살아냄은 결국 낯선 곳에서의 정착과 적응의 투쟁으로 흔히 나타난다.

반수연의 소설들은 이 경향으로부터 이탈한다. 자발적으로 이탈하는 게 아니라 불가피하게 탈락한다. 모든 인물들은 적응에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며, 따라서 자신이 이동한 공간으로부터 내팽개쳐진 존재들이다. 인간 생활의 기본 환경이 ‘의식주’임을 우리는 초등학생부터 배워 알고 있다. 반수연의 인물들에게는 ‘주(住)’가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

인간 생활의 근본요소인 ‘의식주’ 중에서 ‘거주’는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결정인자가 되고 있다. ‘굷주림’은 많이 해결이 되었으며, ‘의복’은 신분과 표현에 해당하는 반면, ‘거주’는 존재의 가능성 자체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2016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매뉴 데스몬드(Matthew Desmond)는 『쫒겨난 사람들』에서 “안정적인 주거 없이, 다른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으며,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역시,『21세기 자본』에서 ‘주거용 부동산’이 ‘현대 국가 전체 자본의 절반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보고했었다.

이런 점들에 비추어본다면 반수연의 인물들은 생존의 극단적인 위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이런 환경에서 인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반수연의 소설이 바로 이 지점에서 반동한다. 그의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항상 불안정한 일용 노동일 뿐인데,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 가장 성실하게, 가장 치열하게 진력한다. 그럼으로써 생의 불꽃이 끊임없이 옮겨가는 궤적을 이루는데, 놀랍게도 그 운동의 자취가 독특한 공간을 남긴다.

그러자 거기에는 적응과 정착을 향한 갈망은 사라지고 오로지 생의 활동만이 남는다. 가령 이런 대목을 보라.

길이 지루하니 졸음이 몰려왔다. 이대로 잠들고 싶기도 하고 잠이 들까 두렵기도 했다. 손톱으로 허벅지를 꾹꾹 누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좀체 잠은 달아나지 않았다. 조수석의 바구니에서 새콤한 맛이 나는 젤리를 더듬어 찾았다. 졸릴 때 먹으라며 제이크가 챙겨준 젤리였다. 젤리는 턱이 뻐근할 정도로 시었다. 순식간에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눈이 번쩍 떠졌다. 짧은 신맛이 지나니 순한 단맛이 났다. 단물이 끝날 즈음엔 잠시 반짝이던 신경이 다시 무디어졌다. 삭은 고무줄처럼 집중력이 툭 끊겼다. 끊긴 집중력 사이로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파트타임 여행자」, p.76)

수도원의 미로 같은 계단을 내려와 마을을 지나 뻘밭을 향해 걸었다. 뻘밭은 질퍽하지 않고 단단해서 걷기 나쁘지 않았다. 발에 바닷물이 찰랑거리게 닿았을 때 프레살레의 검은 얼굴이 보였다. / 나는 뻘밭에 쪼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땅을 팠다. 웅덩이가 얼마큼 깊어졌을 때 물이 조금씩 고였다. 웅덩이에 손을 넣고 흙으로 덮었다. 뜻밖에 따뜻한 기운이 손끝으로 전해졌다.(「프레살레」, pp.175~76.)

심지어 반려견에게 음식을 주는 가운데 드러내는 이런 감각은 어떤가?

핀치는 가늘고 긴 혀를 날름거리며 순 식간에 먹어치우고는 두어 번 더 빈손을 핥는다. 핀치의 혀는 따뜻하고 촉촉하며, 간절하다. 애나는 봉지째라도 털어주고 싶은 마음을 누른다. (「설탕공장이 있던 자리」, p.10)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é는 현대에 와서 창출된 새로운 공간(?)이 ‘비-장소non-lieux’임을 가리킨 바 있다(Marc Augé, Non-Lieux - Introduction à une anthropologie de la surmodernité, Paris: Seuil, 1992; 국역본『비장소 :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아카넷, 2017)

그의 책에 등장하는 현대인, 피에르 뒤퐁은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뽑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고, 면세점에서 쇼핑을 한 뒤 비행기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용카드와 탑승권으로 신분을 증명하고, 표지판과 안내 방송의 지시에 따르며 철저히 혼자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익명성의 공간을 소비”한다. 바로 이것이 넘쳐나는 공간들과 대비되는 비-장소의 모습이다. 온갖 장소들이 정착과 소유와 축적과 인연,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면, 비-장소는 장소로부터 쫒겨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어떤 삶의 형식들이다. 중요한 것은 비-장소에도 삶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비-장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그 삶이 생존력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가리킨다.

간단히 말하면 위 인용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듯, 비-장소의 인물들은 그들의 생명 활동 자체를 존재의 거처로 만든다. 그리고 그 활동들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이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움직임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생존의 띠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 오제가 “고독의 인류학 ethnologie de la solitude”라고 부른 이것은 점점 더 그 중요성이 더해가는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이다. 반수연의 소설들은 정확히 그것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아쉬운 건 아직 그 방향의 초입에 있을 뿐이라는 점. 고독이 가짜 소통의 세계를 폭발시킬 에너지를 충전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김유나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에 처음 내놓은 단편소설은 <이름 없는 마음>이며, 이 단편이 수록된 첫 소설집이 바로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이다.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중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없다. 제목은 그저 책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일 뿐이다. 일곱 편의 소설을 대표하는 이름이라면, 수록작 모두가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진실이 하필 ‘믿을 수 있을 만큼’이어야 하는 걸까. 본래 진실이란 전적으로 믿을 수 있어야 비로소 진실이라는 이름을 얻는 법이 아니던가. 궁금한 마음에 자꾸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을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진실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믿을 수 있을 만큼’이라는 조건 위에 성립되는 한정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맥이 읽힌다. 여기에 약간의 억하심정을 보태어 한 발 더 나아가 보면, 진실은 믿을 수 없는 편에 속하기도 한다. ‘있을’이 ‘없을’로 바뀌어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진실’이 되는 식이다. ‘믿을 수 있으나 다 믿을 수는 없는 게 진실’이라는 말과, ‘믿을 수 없으나 다 믿지 않을 수 없는 게 진실’이라는 말의 차이는 그리 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가 김유나의 첫 단편과 첫 소설집의 제목을 나란히 언급하며 운을 뗐던 이유는, 두 제목 사이에 ‘없는’과 ‘있을’이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김유나의 소설들이 작가 나름의 ‘존재론’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었다. 작가가 작품 제목에 ‘이름’이라는 말을 넣었듯, 필자 역시 ‘대표하는 이름’, ‘진실이라는 이름’이라며 의도적으로 ‘이름’이라는 단어를 썼다. 이처럼 김유나의 존재론은 ‘마음’이든 ‘진실’이든 그것이 단지 이름일 뿐 실체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세계관에서 파생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가깝게는 12세기 스콜라 철학의 보편논쟁 중 ‘유명론(唯名論)’을 떠올리게 하며, 멀게는 노자의 ‘명가명 비상명(名可名非常名)’을 상기시킨다.

‘있음’이든 ‘없음’이든 이름을 붙이는 순간, 두 개념 사이의 틈은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 한쪽에 강제로 갇히게 된다. 어쩌면 김유나는 사라진 그 틈, 즉 여지를 아주 크고 넉넉하게 벌려놓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대책 없는 ‘엄마’ 캐릭터들을 반복해서 만나본 결과, 필자는 작가가 ‘있음과 없음’을 비롯해 단어로서의 ‘엄마’와 같은 모든 언어적(名) 경계를 지우려 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둡지만 끝이 없어 매혹적인 이상한 ‘와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싶어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소설 속 엄마는 물론 화자의 엄마지만(<너 하는 그 일>, <내가 그 밤에 대해 말하자면>), 때로는 남동생 현권(<이름 없는 마음>), 석용(<랫풀다운>), 진희 씨(<부부생활>), 김기왕(<물이 가는 곳>), 그리고 화자인 채림 자신(<으름 씨 뱉기>)이 대책 없는 엄마이기도 하다.

비호감으로 등장한 인물들을 끝내 희한하게 끌리는 존재로 둔갑시키는 마술의 비밀은, ‘이름’이라는 속박의 끈을 김유나 특유의 해체 기술로 풀어버리는 데 있다. 이 해체 기술이 매력적인 이유는 속박이 풀려 이름이 와해되는 순간, 우리에게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흔히 유머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기술은 참혹한 순간조차 어김없이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익살이나 농담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경계를 기꺼이 박탈당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정화된 허공에서의 ‘초월적 웃음’이다. 그래서 아무리 웃어도 옆구리가 결리지 않는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파트타임 여행자

반수연의 인물들은 거의 길 위에 있다. 여행 중이거나 노숙 중이거나 이주 중이다. 삶에 정착한 사람은 없다. 이들은 “미국에도 없고 한국에도 없는 사람”(「설탕공장이 있던 자리」)들이다. 임시적이고 불안정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의 인물들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부실하고 허술한지 암시한다. 반수연의 인물들은 중년이거나 노년에 이르러 있고, 부부관계는 일찍부터 훼손되어 있다. 상실과 폭력의 과거로부터 낯선 곳으로 이주해 아이를 키우면서 두려움과 욕구불만과 죄의식 속에서 산다. 이주는 많은 경우 도망의 다른 말이다. 노숙이거나 여행, 심지어 여러 소설에 나오는 공간인 요양원도 떠도는 인물들의 불안정한 현실을 표상한다. 한 인물은 5년째 차 안에서, 그러니까 길 위에서 풀타임 여행자로 산다. 도망가기 좋은 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파트타임 여행자」)

그렇지만 반수연의 인물들은 이런 두려움과 차별과 불안정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자유로운 존재, 독립적인 삶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는다. 한계 안에서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반수연의 인간론은 실존적이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선택해서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사는 건 선택해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조각들」), 멀쩡히 잠들었다가도 아침이면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달에 한 명쯤은 있는 요양원에 거주하면서도 “나대로 살다가 나로 죽”고 싶어 한다. “죽을 때까지 산 사람이 할 법한 것들을 하고 싶다. 춤추고, 노래 부르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만지며 살고 싶다.” (「춤을 춰도 될까요」)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은 것이 반수연 인물들의 꿈이다(「파트타임 여행자」). 그것이 그의 인물들이 결핍과 불만의 현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자각과 함께 생에 맞서는 의지도 같이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다.

한 단편 속 화자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늘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였다고 서술하는데,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각도’는 이 소설의 시점이기도 하다. 이 시선이 내려다보는 것은 인생이다. 반수연의 소설은 인생에 대한 노래이다. “잃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것들을 잃고도 살아진다는…생의 비밀” (「프레살레」)을 말하기 위해 이 작가는 사소해 보이지만 수평을 맞추기 위해 없으면 안 되는 ‘조각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다. 기교도 허세도 부리지 않고, 우연한 행운이나 횡재도 노리지 않는 이 작가의 우직하고 성실한 소설 문장이 미덥다.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근육을 키우는 남자가 있다. 직업은 헬스 트레이너. 몸의 정직함만큼이나 노력의 정직함 또한 믿는 사람이다. 선배이자 웨이트 파트너였고 그가 일하는 피트니스 센터의 오너이기도 한 사람이 회원들의 회비를 들고 잠적해 버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땀과 시간 그리고 운동의 양만큼 근육이 정직하게 커지는 것처럼 생활도 미래도 그렇게 단단해지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유예하거나 포기한 것들이 많았다. 근육을 위해 강박적으로 식단을 조절하고 미래를 위해서는 연인과의 약속을 유예했다. 그런데 그렇게 키운 근육을 지금은 회원들의 항의를 받는 것에만 쓰고 있다. 큰 근육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근육이 자랐다고 해서 맷집도 같이 자란 것 또한 아니다. 단편소설 ‘랫풀다운’의 주인공 애기다.

또 다른 소설 ‘너 하는 그 일’에서는 딸과 함께 택배 상하차 센터에서 일을 시작하는 엄마가 등장한다. 딸이 ‘하는 그 일’이 만만해 보여서는 아니다. ‘엄마가 하는 그 일’ ‘엄마가 해야 할 그 일’이 딸의 집에는 너무 없기 때문이다. 지극한 모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때는 폭력적인 남편에게 매여 살았고, 지금은 또 폭력적인 동거인에게 한없는 연정을 느끼는 이 엄마에게는 모성만이 자신의 존재 증명인 것 같지는 않다. 한편으로는 철없는 엄마이고 한편으로는 매 맞는 여자인 이 인물의 살아가는 힘은 생활의 관성과 그 관성에 탄력을 보내는 명랑함뿐이다. 노년에 접어든 이 인물에게는 노동조차 정직하지 않다. 그런 엄마를 감당해야 하는 딸의 피로는 겹으로 쌓인다. 그래도 모녀는 같은 길로 탈출한다. 목적지가 달라도 탈출하는 길은 같다.

일곱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소설집 제목인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은 수록작에서 따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제목이고 문장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은 과연 진실일 수 있을까. 어느 만큼만 믿으면 그 얄팍한 진실에 배반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다시 소설 ‘랫풀다운’으로 돌아가 보면, 이 운동은 광배근을 단련시키는 운동이라고 한다. ‘일상생활에서는 몸의 후면 근육을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잡아주는 운동이 중요하다’고 주인공은 회원들에게 말하곤 했다. 말하자면 광배근은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등 뒤의 근육이다. 김유나가 소설에서 그리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등 뒤의 세계인 모양이다. 가진 거라고는 소박한 생활과 자기 몸밖에 없는 사람들, 그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등 뒤에 놓인 손톱만큼의 진실.

그 작은 진실에조차 배반당한 ‘렛풀다운’의 인물이 마침내 가닿는 곳은 바닷속이다. 그토록 무거웠던 바벨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는 곳. 그러나 가라앉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이다. 비록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겠으나, 그것도 누군가의 손목도 아니라 발목을 잡아야 올라갈 수 있겠으나, 그렇더라도 중요한 것은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승 신호를 보낸 백석의 발목을 붙잡고 서서히 수면으로 올라가며 석용은 무릎이 꺾인 그날 이후부터 실은 한 번도 내려놓은 적 없었던 무거운 바벨을, 이제야 물속 깊이 내려둔 것 같았다.” 그래 봤자 물 바깥은 다시 손톱만큼의 진실도 찾기 어려운 세계이겠으나.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파트타임 여행자

반수연의 소설 「파트타임 여행자」는 이민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민, 올해 67세가 된 한국 출신의 이민자 여성이다. 한국의 고향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와 살아왔고, 지금은 미국의 국립공원을 일주하기 위한 여행길 위에 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사회에 동화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겉돌며 살아온 과정은, 여러 겹으로 겹쳐진 타자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민의 정체성은 지리적 경계, 문화적 경계, 젠더적 경계, 계급적 경계, 인종적 경계, 한국계 이민자들 사이의 경계 등이 중층적으로 가로놓인 지점에 놓여 있다.

민에 의하면, 그녀의 삶은 “혼자 남겨졌다는 불안”(102면)이 반복해서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미국에 이민 와서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을 다니며 두 딸을 키워냈다. 도박에 빠져 있던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어렵게 겨우겨우 키워낸 두 딸은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가 버렸다. 퇴직 후 마트의 캐셔로 일하며, 한국 전쟁 고아로 미국에 온 제이크와 그의 아내 오드리와 이웃하며 친구처럼 가족처럼 잘 지냈다. 하지만 오드리는 파킨슨병으로 죽었고 제이크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미국의 국립공원을 돌아보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직접 운전대를 잡고 길을 나섰다. 이주(이민)가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많고 ‘나’를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옮겨 놓는 것이라면, 여행은 이주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여행은 ‘나’가 주어가 되어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따라 공간을 이동하는 과정이다. 여행에 나를 찾고 나를 입증하는 실존적 모험의 성격을 지니기도 하고, 기존의 삶과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망명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행의 과정에서, 전남편으로부터 도망쳐 5년째 여행 중인, 한국 출신 이민자 클로디아를 만난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출신 이민자이고 남편의 폭력이 그녀들의 삶과 가족을 망가트렸고 한국과 미국 어디에도 동화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차이는 있다. 클로디아가 돌아갈 집 없이 길을 떠도는 풀타임 여행자라면, 민은 돌아갈 집을 두고 떠나왔고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파트타임 여행자라는 것. 클로디아는 남자 친구를 만나러 떠났고, 민은 길 위에 다시 혼자 남았다. 다시 “혼자 남겨졌다는 불안”이 밀려든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사람들로부터 버려져서 혼자 남게 되는 과정의 연속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 과정에서 집에서도 길에서도 혼자로 남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혼자됨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버려져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녀가 욕망했던 것은 아닐까. 여행에서 민은 자신의 오랜 꿈을 기억한다.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106면)

이 지점에 이르면 소설 「파트타임 여행자」가 말년의 양식에 담아낸 여성 이민자의 서사라는 점을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술가들의 말년 작품이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조화나 성숙을 제시하는 대신에 불화와 비타협의 특성을 내보이는 양상을 두고 말년의 양식(late style)이라 부른 바 있다. 말년 또는 노년에 씌어졌지만, 사회적 규범이나 전통적인 기대를 거부하고 주관성과 부정성을 강조하는 경우들을 두고 말년의 양식이라 한다. 이 글에서는, 주인공의 연령이 노령인 것은 아니지만, 삶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지는 여행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에 말년의 양식 개념을 적용한다.) 민은 모순, 차별, 불평등이 사라졌다거나 좋아졌다거나 내가 그 상황을 이겨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억압적인 상황에 패배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삶을 타자화하려는 힘(그녀를 혼자 버려짐의 상태로 내모는 힘)이 여전히 그녀의 삶에 드리워져 있음을 인정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토대부터 스스로를 망명시키며 자유로운 주관성(자아)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모조리 빼앗김 또는 모두로부터 버려짐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아름답고 강한 혼자(단독자)가 되고자 하는 능동성을 계속한다. 이민자 서사와 말년의 양식. 이주민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으로 수렴되는 서사가 아니라, 단독자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아름답고 강한 혼자’를 지향하는 이민자 서사. 아마도 이 근방에서였을 것이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이 소설집을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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