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홍수를 막아라’…파시즘의 심리적 기원 [.txt]
여성, 노동자, 공산주의는 ‘위협적인 물의 흐름’으로 인식
남성결속체인 군대는 홍수를 막는 ‘댐’으로 상징화

1970년대 후반 독일에서 출간돼 파시즘 연구의 독창적 고전으로 평가받는 ‘남성 판타지’가 거의 50년 만에 한국에서 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파시즘 연구를 넘어 젠더·문화 연구에서도 오랫동안 중요하게 인용돼 온 저작으로, 그간 독일어판 원저 또는 영역본으로 접해온 국내 연구자들과 독자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독일의 문화평론가 클라우스 테벨라이트가 쓴 ‘남성 판타지’는 1920년대 독일, 즉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활동했던 자유군단 분석을 통해 파시즘의 기원을 추적한다. 자유군단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20년대까지 독일에서 활동한 의용군으로, 좌파 세력 진압과 국경 분쟁에 개입한 우익 민병대였으며, 구성원 상당수는 훗날 나치군으로 흡수됐다.
책은 자유군단 대원들의 일기와 편지는 물론, 당시의 문학 작품, 만화, 광고, 선전물, 포스터 등을 폭넓게 아우르며 집요하게 분석한다. 그 결과 파시즘이 단순히 정치적 상황이나 경제적 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남성들의 감정과 신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파시즘적 남성성은 여성에 대한 적대와 공포, 혐오를 바탕으로 형성됐다. 초기 파시스트들에게 여성은 혼돈과 ‘붉은 홍수’(Red Flood)의 상징이었다. 여성은 피, 용암, 진흙처럼 경계가 불분명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액체적 이미지’로 표상되며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됐다. 반면, 남성은 경계가 분명하고 통제된 ‘단단한 몸’으로 상상됐다. 이때 군대는 그러한 남성들의 결속체로서, 흐르는 위협을 막아내는 ‘방벽’이자 ‘댐’으로 상징화된다.
자유군단 대원들은 여성뿐 아니라 노동자, 혁명, 공산주의 역시 ‘흐르고 넘치는 존재’로 인식하며 억압과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다. 패전과 혁명이 불러온 독일 안팎의 변화가 ‘홍수’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인식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물은 경계를 넘는 존재다. 국가의 경계, 육체의 경계, 관습의 경계를 모두 침범한다. 무엇인가 넘쳐흐르는 순간, 안과 밖의 질서는 붕괴되고 내부의 댐은 무너진다.’ 이에 맞서는 자유군단의 이미지는 질서정연한 행진이다. 건조하고 단단한 형태로, 마치 댐을 쌓듯이 착착 움직이는 존재다.
이에 따라 자유군단의 선전물과 문학에서 공산주의는 언제나 ‘붉은 홍수’나 ‘붉은 파도’로 묘사됐다. “볼셰비즘의 파도가 밀어닥치고 있다” “빨갱이들이 물밀고 들어온다” “발트해 연안을 붉은 홍수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식의 표현들이 반복됐다. 그러니 ‘여성’과 ‘공산주의’의 결합은 이들을 가장 경악시키는 존재였고, 이들은 공포를 혐오로 바로 치환시킨다. 여성 공산주의자는 무조건 ‘창녀’라고 불렀다.

불안과 공포를 견디기 위해 이들은 더욱 단단한 결속을 지향했다. 그 형식이 바로 군대다. 전투와 전쟁은 이들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묶었다. “밤마다 열변을 토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로 모였고, 우리의 목소리는 더욱 격정적으로 높아졌다”는 고백은 그 집단적 열광을 보여준다.
“남성 연대의 일치단결. 여성의 개입이 없는 탄생. 재탄생. 단단하고 긴장되고 드높은 경지로 일어서는 남근적 고양. 타락하고 썩어가는 세상이라는 여성성의 늪과 인연을 끊기. 전투 중에 경험하는 자아 융해.” 저자는 이런 주제들이 군인 남성의 글을 관통한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자신의 ‘단단한 경계’를 지키기 위해, 흐르고 넘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충동, 이 같은 대립쌍적 사고에서 비롯된 불안과 방어가 공격과 폭력으로 전환된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책은 파시즘을 감정과 신체의 차원에서 분석하고, 상징 구조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인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정신분석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읽기가 쉽지 않다. ‘통찰적이지만 난해하다’, ‘강력한 해석 도구이지만 과잉 해석적이다’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대립쌍적 인식과 공포, 불안이 폭력으로 치닫는 과정에 대한 분석은 오늘날의 극우와 혐오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틀을 제공한다.
책을 펴낸 출판사 글항아리 쪽은 “미학, 페미니즘, 독문학, 역사, 정신분석학 등 다양한 학문을 아우르는 방대한 텍스트라 특정 전공자가 번역하기 어려운 탓에 국내 출간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독일에 거주하며 극우 문제를 오랫동안 탐구해 온 김정은 번역가의 노고 덕분에 출간이 가능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1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읽기의 즐거움을 준다면 그것은 뉘앙스와 정서를 최대한 살려낸 번역의 공이 크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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