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1등급은 1시’ ‘2등급은 2시’ 직원끼리 은어… 기업등급 조작한 평가사

조민희 기자 2026. 3. 27.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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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평가데이터 직원 35명 수사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뉴스1

경찰이 국내 최대 기술신용평가(TCB) 업체인 한국평가데이터가 기업들의 기술 등급을 조작한 혐의를 포착해 수사 중인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경찰은 기술력이 부족한 기업이 정책 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한국평가데이터 직원들이 허위로 ‘우수 등급’을 매긴 정황을 잡고 경영진의 지시가 있었는지 등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중소 기업이 은행에 기술 금융 대출을 신청하면, 은행은 한국평가데이터 등 TCB 업체에 의뢰해 기업의 기술력을 평가하고 이를 기초로 대출 여부를 결정한다. 기술 금융 대출은 대부분 정부 정책 자금으로 집행된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은 최근 신용정보법 위반 및 업무방해 혐의로 한국평가데이터 직원 35명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애초 이 사건은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수사해 왔다. 그러나 한국평가데이터 직원들의 조직적 평가 조작 혐의가 짙다고 보고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이 사건을 가져와 수사 확대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본지는 한국평가데이터 직원들이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 내용 등 내부 자료를 확보했다. 자료에는 이 회사 직원들이 지난 2021년 9월부터 2023년 5월까지 기업들의 기술력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중소 기업의 기술 등급을 허위로 매겨온 정황이 담겼다. 이들은 기술 관련 인력이 전무해 등급 산출이 불가능한 기업에 대해 한국평가데이터 직원이 보유한 국가기술자격증을 끼워 넣은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 다른 기업을 평가할 때 제출받은 관련 직원 기술 자격증을 다른 기업 평가서에 가져다 붙이는 ‘자격증 돌려막기’ 수법을 쓴 정황도 확인됐다.

그래픽=백형선

한국평가데이터 직원들은 평가서에 기업이 보유한 기술의 전문성을 입증하는 연구 성과도 허위로 기재했다. 평가 담당자들이 업체 직원과 이름이 같은 저자의 학술 논문을 무작위로 찾아낸 뒤, 이를 해당 기업 직원의 연구 실적인 것처럼 평가서에 기재한 것이다. 경찰은 한국평가데이터 직원 조사에서 “높은 기술 등급을 받기 어려운 회사인데 사업부의 요청으로 평가를 조작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평가데이터 평가 담당자들끼리 은어를 사용해 신용 등급 조작을 은폐하려 한 정황도 포착됐다. 평가 담당자들은 기업 평가 기간에 ‘3시 전송 요청’ ‘2시 요청’ 등의 메시지를 내부 메신저를 통해 주고받아 온 것이다. 이는 기술 신용 등급(AAA~D까지 10단계)을 시간으로 빗댄 것으로 최고 등급인 AAA는 1시, 최하 등급인 D는 10시로 표현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실제로 ‘3시 요청’ 메시지를 받은 평가 담당자가 평가 대상인 중견 건설사에 A등급을 부여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평가데이터는 신용보증기금·산업은행 등 국책 기관과 민간 시중은행 등이 공동 출자해 2005년 설립됐다. 국내 최대 기업 신용 평가 전문 기관이다. 2012년 시중은행 지분이 늘면서 민영화가 됐지만, 경영진은 금융 당국 고위직 출신이 주로 맡고 있다. 정부 정책 자금인 기술 금융이 건전하게 유지되려면 TCB 업체들의 엄밀한 기술 평가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평가데이터 등 TCB 업체들은 은행에서 기술 등급 평가 1건당 60만~100만원씩 수수료를 받는 ‘을(乙)’의 위치에 있다. 대출 실적을 높여야 하는 은행과, 은행에서 평가 수수료를 챙기는 TCB 업체 간에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조직적인 평가 조작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경찰은 의심한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기술 평가 기관이 등급을 낮게 책정해 대출이 무산될 경우, 은행으로부터 평가 수수료를 받지 못한 경우도 많다”고 했다. 경찰은 한국평가데이터 임직원들이 등급 조작을 대가로 중소기업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는지 여부도 수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평가데이터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내부 통제·시스템을 정비해 유사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기술신용평가(TCB)

기업의 기술력·사업성·경영 역량 등을 종합적으로 심사해 등급을 부여하는 제도다. 신용 등급이 낮지만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들이 원활하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2014년 7월 도입됐다. 시중 은행들은 TCB사가 발급한 기술평가 등급과 평가서를 바탕으로 대출 한도와 금리를 책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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