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빌런들] 우리는 서로를 망친다, 그저 하찮은 일 때문에
LG아트센터 '바냐 삼촌' vs 국립극단 '반야 아재'
영화 '파반느' 화제 고아성, 다시 못생긴 설정 소냐로
편집자주
현실에선 피해야 할 상대지만 무대 위의 빌런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중요한 축입니다. 공연 담당 김소연 기자가 매력적인 무대 위 대항자들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바냐, 당신은 교양 있고 현명한 분이니까 아실 거예요. 악인이나 화재 때문에 세상이 망하는 게 아니라 증오, 적대감 같은 하찮은 일 때문에 세상이 망한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희곡 '바냐 아저씨'에서 엘레나의 이 한마디는 130년 전 러시아 격동기를 넘어 2026년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과 재난, 흉악한 사건이 이어지는 시대지만 막상 삶을 갉아먹는 현실적 문제는 거악(巨惡)이 아니다. 무기력과 권태 속에 서로의 삶을 망가뜨리는 바냐의 가족처럼 주변 사람의 사소한 이기심과 무심함 같은 작은 적대감은 관계와 일상을 좀먹는다.
지난해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러'로 맞붙었던 LG아트센터와 국립극단이, 캐릭터끼리 서로가 서로의 빌런이 되는 '바냐 아저씨'를 비슷한 시기에 무대에 올린다. 배우 손상규가 연출하는 '바냐 삼촌'은 5월 7~31일 LG아트센터에서, 조광화 각색·연출로 한국적 색채를 입힌 '반야 아재'는 5월 22~31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각각 공연된다. '바냐 삼촌'에선 이서진이 바냐를, 고아성이 소냐를 연기한다. 두 배우의 연극 데뷔작이다. '반야 아재'에선 조성하가 박이보(바냐)로, 심은경이 서은희(소냐)로 등장한다. 일본 활동이 활발한 심은경도 국내 연극 출연은 처음이다.
'좌절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비극

1897년 희곡으로 발표됐고 1899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초연한 '바냐 아저씨'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시골 영지에서 죽은 누이의 딸인 소냐와 함께 토지를 지키며 살아가는 주인공 바냐가 도시에서 온 매부 세레브랴코프 교수와 그의 새 아내 옐레나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질투와 환멸의 이야기다.
비극의 불씨는 이기적 인물인 세레브랴코프가 던진다. 영지를 팔겠다는 그의 말에 평생 헌신한 대가로 영지를 잃게 된 바냐는 매부에게 총을 겨눈다. 체호프 연극에서 비극은 한 사람의 악의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세레브랴코프는 이기적이며, 세레브랴코프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옐레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지만 모두의 욕망을 흔든다. 바냐는 자신의 무능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며 날을 세운다. 누구도 악인이라 단정하기 어렵지만 서로 삶을 조금씩 망친다. 악당이 아닌 '좌절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비극이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다.
"끊임없이 비교와 평가 속에 놓이는 삶"

한국에서 두 단체가 나란히 1,000석 넘는 대극장에 작품을 올려 이례적이긴 하지만 '바냐 아저씨'는 최근 다른 나라에서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이 작품이 전 세계 무대의 스테디셀러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극단적인 악인이 등장하지 않아서다. 체호프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소한 일로 서로를 상처 입히는지, 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비극처럼 거대한 야망이나 피의 복수는 없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지독할 정도로 적나라한 현실이다. 체호프의 작품에는 일상적 좌절과 체념이 담겨 있다. 2024년 공연된 전도연 주연의 '벚꽃동산'이나 전미도의 8년 만의 무대 복귀작으로 8월에 있을 '갈매기'도 비슷하다.
관객은 문득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공연장까지 와서 이토록 비루하고 지루한 타인의 삶을 지켜봐야 하는가. 답은 체호프의 서신에서 전해지는 유명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얼마나 나쁘고 따분한지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었다"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반드시 더 나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낼 것"이라고 했다.

'바냐 아저씨'는 체호프의 실패를 딛고 나온 작품이다. 그는 1889년에 발표한 '숲귀신'으로 엄청난 혹평을 받고 이 작품의 출판과 공연을 금지했다고 한다. '바냐 아저씨'는 '숲귀신'을 개작한 작품이다. 내용은 비슷하게 흘러가지만 한쪽은 바냐가, 한쪽은 이고르가 등장한다. 큰 차이는 주인공의 운명이다. ‘숲귀신’의 이고르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반면 '바냐 아저씨'에서는 총이 두 번 발사되지만 아무도 죽지 않는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자신이 살지 못한 다른 삶에 마음을 뺏긴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나은 인생이 됐으리라 상상하며 내 찬란한 인생을 타인이 뺏었다는 적대감으로 상대를 할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묻는 동안 삶은 지나가 버린다. 체호프가 만든 가장 잔인한 비극은 살인이 아닌 인생 낭비인 셈이다.
손상규 연출가는 "인류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더 행복해지는 방향은 아닐 수 있다"며 "성취와 성공 중심 사회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와 평가 속에 놓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이해라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 삶이 어떤 모양이든 나무의 나이테처럼 있는 그대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왔다"며 "'바냐 삼촌'은 서로의 결핍을 비난하기보다 우리가 서로를 마주하기 위해 얼마나 서툴게 노력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조광화 연출가 역시 기획 의도를 묻는 질문에 "시대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급격하게 변해가고 평생의 노력들이 무용한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평생이 부정당하는 기분, 나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듯한 불안감과 무력감이 드는 나와 내 주변의 모습이 '바냐 아저씨'의 인물들 같다"고 답했다.
시련을 참아 나가야 한다는 소냐의 위로

누군가에게 빌런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지독한 관계 속에서, 체호프가 내놓은 구원은 뜻밖에도 가장 많이 상처받은 자의 손길이다. 무대 위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소냐(고아성·심은경)다. 소냐는 스스로 외모에 자신이 없는 인물로, 의사 아스트로프를 짝사랑하지만 마음 한번 제대로 전해보지 못한다. 정작 아스트로프의 시선은 아름다운 새어머니 엘레나에게 향해 있다. 최근 영화 '파반느'에서 타인의 시선에 움츠러든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낸 고아성은 이번 무대에서도 타인에게 삶을 잠식당하면서도 끝내 타인을 끌어안는 소냐를 연기한다.
이 숭고한 위로는 현대 명작들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가 그렇다. 아내를 잃은 가후쿠와 상처 입은 미사키가 설원을 달리는 여정 속에 침묵의 위로를 나누던 결말은 체호프가 설계한 이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는 '바냐 아저씨' 공연을 준비 중으로, 생전 아내가 녹음해 준 테이프를 틀어놓고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외우는 장면이 반복된다.
영화 속 미사키가 그랬듯, 소냐는 절망에 빠진 바냐에게 길고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내야만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평화가 있음을 전하며 위로한다. 운명이 보내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는 쉴 수 있을 것"이라고.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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