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 속의 쿠바… 휴대폰 불빛으로 밤을 버텨냈다
치안 좋은 수도 아바나에서도
“외국인 밤에 다니지말라” 충고
베네수엘라 원유 공급 끊긴 탓

지난 21일(현지시각) 오후 7시 쿠바 아바나 말레콘 해변 너머로 노을이 졌다. 여느 나라의 수도라면 불빛이 하나둘 켜지면서 야경(夜景)을 뽐내야 할 시간이지만, 아바나는 그대로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늘과 땅, 바다가 전혀 분간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곧바로 내려앉았다. 3월 들어 세 번째, 그 주에만 두 번째 ‘국가 정전(停電)’ 사태가 찾아온 것이다. 주민들의 휴대전화에는 “현재 10%를 제외한 국가 전역의 전기 공급이 끊겼다. 병원 9곳만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정부의 긴급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불안정하던 인터넷 접속도 얼마 뒤 끊겼다.
관광객이 쓰는 달러에 경제를 크게 의존하는 공산주의 쿠바는 원래 치안이 좋은 편이다. 경찰들도 외국인 관광객들의 안전을 특히 신경 쓴다. 하지만 이날 아바나 주민들은 “혹시 모르니 외국인은 웬만하면 밤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충고했다. 차량 통행도 뜸하고 가로등 하나 없이 주변 사물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캄캄한 밤거리를 걷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됐다.
쿠바는 코로나 이후 심각해진 연료난과 노후 화력발전소 및 전력망 문제로 2021년부터 만성적 정전 사태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에 최근 ‘베네수엘라 불똥’까지 튀면서 전국적인 정전 사태는 규모가 더욱 확대되고 빈도도 잦아졌다. 반미(反美) 성향의 쿠바와 베네수엘라는 독특한 상호의존관계로 엮여있다. 베네수엘라는 쿠바에 원유를 저가로 공급하고, 쿠바는 그 대가로 의사·간호사 등 보건 인력과 정보·치안·경호 분야에 인력을 파견해 왔다. 쿠바 석유 소비량의 약 30~40%가 베네수엘라에서 왔다. 하지만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전격 체포한 뒤 “다음 차례는 쿠바”라며 쿠바로 향하는 원유 공급을 끊은 것이다.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최근 “섬 전체에 석유 공급이 3개월 넘게 끊긴 상태이며 현재 태양광, 천연가스, 일부 화력 발전소로만 전력을 가동 중”이라고 했다.


◇발전기 돌리는 외국인 호텔만 환해… 낮엔 주민 몰려와 ‘전기 구걸’
전날 아바나의 관문인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모든 에스컬레이터는 멈춰 있었다.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도 수시로 멈춰 섰다. 실내 필수 구역을 제외한 공항 불은 꺼져 있었다. 한국 외교부로부터 “쿠바 내 전력 상황이 심각하고 통신망이 열악하니 가족과 지인에게 행선지를 사전에 통보하라”는 권고 메시지가 들어왔다. 아바나 시내 숙소에 체크인을 하자 관리인은 ‘비상용’이라며 라이터와 촛불, 휴대용 조명 기구를 건넸다.
전기 없는 쿠바인들은 휴대전화 플래시, 휴대용 조명기구, 촛불 등에 의지해 밤을 보내고 있었다. 몇몇 주민들은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고 거리에 둘러앉아 숫자가 적힌 타일을 맞추는 ‘도미노 게임’을 했다. 식당 종업원들은 “아직 얼려놓은 얼음은 녹지 않았다. 맥주는 차갑다”며 호객을 했다. 실제 많은 식당은 휴대용 조명 기구나 촛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서빙을 했다. 피자집은 화덕의 불빛을 조명 삼아 영업을 계속했다. 밴드는 어둠 속에서 쿠바 민요 ‘관타나메라’를 연주했다.
식당 종업원 에르난씨는 “이런 어둠 속에서는 ‘이봐, 친구’ 하고 부르고 나면 더 이상 서로 할 말도 없다. 그냥 멍하니 있으면서 시간을 보낼 뿐 무슨 말을 더 하겠나”라고 했다. 기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쿠바 혁명 당시인) 1959년에는 쿠바가 한국보다 잘살았을 것이다. 지금 한국은 고층 빌딩이 가득하겠지만 쿠바는 이게 현실”이라고 했다. 그는 “정전 상황에서 몸이 아파 병원에 가야 할 때가 가장 두렵다”고 했다. 병원에 가도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다음 날 둘러본 아바나 시내 병원에는 한낮에도 불 꺼진 진료실에 의사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주민들은 저마다 휴대전화 플래시로 어둠을 비추며 길을 걷고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리튬 배터리가 들어 있는 전기 오토바이를 거실에 세워두고 헤드라이트를 조명처럼 켜둔 집도 있었다. 노점상은 익숙하다는 듯 크리스마스 조명 장식을 매대에 빙빙 두른 채 간식거리를 팔았다.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혁명광장의 혁명탑도, 아바나 한복판의 의회 건물도 모두 불이 꺼졌지만 유일하게 불빛을 뿜어내는 곳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묵는 호텔들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지어진 대형 호텔들은 대형 디젤 발전기를 자체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발전기의 ‘웅웅’대는 소리가 아바나의 밤공기를 갈랐다. 삐져나오는 호텔 조명 앞에서 쿠바 소녀들은 K팝 댄스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더위를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도 호텔 주변 벤치에 밤새 진을 쳤다.
숙박업에 종사하는 카를로스씨는 “2024년에는 72시간 연속 정전이 된 적도 있다. 오후 7시에 애들 밥 먹이고 8시면 침대에 눕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며 “냉장고 음식은 모두 상해 끼니마다 빵을 사다 먹었다”고 했다. 휴대용 조명 기구의 배터리가 닳은 후에는 촛불을 태워 가며 버텼다고 했다. 일부 달러를 접할 수 있는 계층에서 1000달러(약 150만원)가 넘는 태양광 패널을 집에 설치하기도 하지만 평균 월급이 5000쿠바 페소(CUP, 약 10달러·약 1만5000원)인 대부분의 주민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물건이다.

다음 날인 22일 햇빛이 아바나를 다시 비추자 저마다 에너지 확보 전쟁이 벌어졌다. 전기가 언제 다시 들어올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20~30% 수준의 휴대전화와 노트북 배터리를 보자 입안이 바싹 말랐다. 한 쿠바인은 기자에게 “오늘 밤도 버티려면 휴대전화 배터리가 필수”라며 미리 충전해 둔 자신의 보조 배터리에서 얼마간의 전력을 나눠줬다. 거리에서는 암시장에서 구했다는 작은 태양광 패널로 휴대전화를 연결해 충전하고 있는 쿠바인도 볼 수 있었다.
자체 발전기가 있는 일부 외국인 상대 식당에는 휴대전화와 조명 기구 배터리의 충전을 식당 관계자들에게 부탁하러 오는 인근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조명 기구에 들어가는 대형 건전지를 서로 주고받기도 했다. 수도 펌프가 멈춰서자 아이들은 상수도관에서 직접 생활에 쓸 물을 바가지로 퍼 올렸고, 미리 받아놓은 물을 대야에 받아 빨래를 하는 주민들도 보였다. 주민들은 “수도 아바나가 이 정도면 지방은 말할 것도 없다”고 입을 모았다.

2021년 7월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기 식량과 의약품 및 생필품, 달러와 전기 등 극심한 물자난에 시달리던 쿠바인들은 1959년 공산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전국적인 시위를 일으켰다. 정치 문제가 아닌 “사람답게 먹고살게 해달라”는 생계형 시위였지만 쿠바 정권은 800여 명을 체포하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그러다 최근 ‘베네수엘라 사태’ 이후 정전의 빈도·규모가 커지면서, 공산당 당사에 불을 지르는 반정부 시위까지 발생했다. 공산당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시민들이 공산당사를 공격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다만 2021년 같은 대규모 소요 사태는 아직까지는 나타나고 있지 않다. 아바나 주민 라파엘씨는 “다른 나라였으면 지금 모든 국민이 들고일어나 정권을 뒤엎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쿠바인들은 어느 순간부터 이런 어둠에 익숙해지고 또 체념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전 24시간이 채 되기 전인 이날 점심 이후부터 운 좋게 전기가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언제 끊길지 모르는 전기를 마음껏 즐기려는 듯 아바나 골목마다 터져 나오던 쿠바 음악은 새벽 늦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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