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음 전폐하고 영화 공부한다’는 말이 가장 잘 맞았던 사람

1961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20살에 낳은 첫 아이였다. 아이는 돌연변이처럼 공부를 잘했다. 초등학교에서 서울대 신문학과에 들어가기까지 언제나 1등이었다. 주로 방안에서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영화만 보았다. 사람들이 형이라고 자주 오해하는 아버지는 이런 장남이 어려웠다. 석사까지 졸업하고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문화부에서 쓴 영화와 음악 기사에는 지금도 기억되는 명문들이 많았다.
신문사 안에서 그 주위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였다. 비슷한 나이지만 다들 그를 선생으로 모시며 같이 영화를 공부했다. 나는 같은 신문사도 아니면서 말석에서 귀동냥을 했다. 그의 머릿속에 어마어마한 영화지식이 있었고, 그의 방에도 어마어마한 비디오 자료들과 책이 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그의 존재가 그대로 인간 시네마떼끄(영화 도서관)였다. 사회부 수도권 담당으로 발령을 받자 단호히 사표를 던지고 신문사를 나왔다. ‘지식인이 새벽부터 남들이 일하는 곳을 기웃거리며 다닐 수는 없다’는 게 내가 들은 사직의 이유였다.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도 거의 전부가 얼마 후 신문사를 퇴사한다. 전 명지대 교수 곽한주, 부산영화제 전 집행위원장 허문영, 미술평론가 한창호, 번역가 이영기 등이 당시 멤버들이다. 퇴사 후 서대문에 허름한 사무실을 얻고 ‘수요전영회'를 만들어서 영화를 계속 공부한다. 미국 채프먼 대학 영화과 이남 교수도 그 시절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느 날 홀연 미국으로 떠나서 뉴욕에 머물며 영화이론 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온다. 귀국 후 활동은 다양했다. ‘필름컬처’를 창간하고, 시네마테크 필름포럼을 만들고, 영상원 등에서 강의를 했다. 광주국제영화제를 잠시 이끌었고, 영화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었다. 독립영화 제작에도 손을 대서 김영남 감독의 ‘내 청춘에 고함’을 제작했다. 많은 예술영화를 직접 수입해 상영했다. 출판사 이모션북스를 만들어 출판사업을 열심히 했다. 대전 아트시네마에서 영화 강의를 하고, 프로그램 구성에 자문했다. 이 시기의 제자들이 투병과정에서 가족처럼 도왔다. 가장 지적이고 아름답고 도전적인 영화를 꿈꿨다. 내가 그에게서 배운 건 영화를 분석하지 말고 먼저 경험하라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는 좋은 태양광 패널이 양질의 전기를 생산하듯 자신의 센서를 끊임없이 갈고 닦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수집된 경험에 그는 가장 솔직하고 단호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많이 부딪혔으나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시대의 공기와 문화 지성사적 맥락이 그 경험을 담는 용기였다. 그로부터 ‘무식하다’는 비난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가 진정으로 좋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 헤어질 때면 불쑥 책을 한 권 내밀었다. 항상 하는 말은 같았다. “읽어봐. 도움이 될 거야.” 공격적 무례함과 문득 드러나는 따뜻함 사이에서 그의 태도는 자주 일관성이 없었다. 그는 영화를 사랑했고, 진심으로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를 좋아하려면 일관된 태도를 기대하지 말고 그냥 임재철(1961~2026·3·22)이란 존재를 사랑해야 했다. 그는 시네필(Cinephil·영화애호가)이었지만, 많은 후배들은 ‘재철 필(Phil)’이었다.
돈과 권력에서는 철저히 멀리 있었다. 가까이 지낸 여성들이 있었으나 결혼하지 않았다. 의식주에는 철저히 무심했다. 술은 전혀 마시지 않았다. 음식에도 큰 뜻이 없었다. 자기 손으로는 옷도 전혀 사지 않았다. 항상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에스에프(SF) 평론가 박상준은 오래전에 그를 처음 만나고, “한국에 이렇게 고수가 있었구나!”는 생각에 평생 그를 따랐다. 많은 후배들이 같은 첫인상을 경험하고 그를 따랐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출판사를 하면서 역자의 번역 속도가 지지부진하거나, 품질이 성에 차지 않으면 직접 번역을 했다. 그렇게 수십 권의 책을 번역해 출판했다. 영어, 일어, 불어 다 능통했다. 친구, 후배들과 커피를 연거푸 마시며 밤늦도록 얘기하는 걸 즐겼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출판 관계자들을 만나고, 제자들을 만나는 게 말년의 생활이었다. 제자들을 권위로 대하지 않고, 논리로 대했기에 자주 말다툼을 하고 헤어졌지만, 이내 다시 만나서 또 설전을 벌였다. ‘식음을 전폐하고’ 영화를 공부한다는 말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이 그였다.
20세기 말 서울에 도착했던 순수 주지주의자, 가장 고결한 형태의 시네필, 한국식 버전의 앙드레 바쟁(프랑스 영화평론가·1918~58), 높고 외로웠으나 더 펼쳐졌어야 할 그의 영화적 이상이 뜻하지 않은 병환에 멈췄다. “영광도 비참도 없는 삶이란 얼마나 사소한 것이냐?” 오래전 그의 집에서 언뜻 봤던 일기 속 글귀대로 그는 영광도 비참도 없는 곳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삶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육상효/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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