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판경제학] 5. 부평·주안산단-구조고도화의 역설

김원진 기자 2026. 3. 2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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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층으로 쌓이고 삶은 더 작아졌다

삼익악기부터 30년 경력 현숙씨
20대 시절, 피아노 부품 검수로 시작
북적이던 현장, 다섯 명의 일터로 변화
7000원 식권 한장, 하루를 버티는 힘

남동산단 숙련공 종현씨
1997년 첫 직장…남동공단에서 시작
PCB 업종 10년, 이후 주안으로 이직
법인 회생 공고에 담긴 산단의 고단함

초미세기업 사장님 혁권씨
칸막이 속 하루·불안한 도전의 경계
노동·현실 사이 흔들린 하루의 기록
고도화 된 산단…노동 가치 묻는 시선

그 시절이 떠올랐는지 현숙(58·가명)씨는 수줍게 웃었다. 그 미소 속엔 30여년 전 그녀가 서 있었다. 인천 부평구 삼익악기에서 여공이던 때를 얘기하면서는 밥 먹는 것도 까먹고 추억을 더듬었다.

"월급 50만원 받는 날엔 부평 지하상가에서 2000원짜리 쫄면 사 먹고, 공장 근처 냉동업체 찾아가 단체로 5000원짜리 피자를 사서 파티를 했었어요."라고 말할 즘엔 현숙씨 얼굴은 소녀가 됐다.

세월이 지나 그 공장부지 길 건너 들어선 지식산업센터 한식뷔페에서 마주한 그녀의 이야기. 기억과 현재가 공간으로 겹치는 순간이었다. 이 절묘한 일치에 기자로서 찌릿함을 느꼈지만, 애써 티 내지 않았다. 그녀의 추억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회사 어려워졌을 땐 동료들과 앞장서서 으쌰으쌰도 많이 했었죠"라고 내세울 땐 또 현숙씨 얼굴이 벼락같아졌다.

▲장면 열다섯. 삼익악기부터 이어진 그녀의 식판 이야기

집집마다 피아노 한 대씩 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피아노들 중 적지 않은 것은 부평에서 만들어졌다. 삼익악기는 1973년 6월 부평4공단에 입주해, 1989년 1억불탑을 수상했을 정도로 지역에선 유명한 향토기업이었다. 1998년엔 법정관리 들어가며 노사가 대립하다 15년 전에 충북음성으로 이사 갔다.

현숙씨는 1억불탑 세울쯤 입사해 회사가 소란스러워지며 나왔다. 소녀였던 10대엔 주변 모두 농사만 짓는 고향이 따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사촌 오빠를 졸라 인천으로 와서 20대 대부분 장면을 부평산단에서 채웠다. 당시엔 노처녀 소릴 들으며 스무살 후반에 결혼했다. 남편은 인천에서 공장 다니는 충청도 출신 남자였다. 애 낳고, 애 키우다가, 애 학교 들어가며 손 덜 탈쯤에, 현숙씨는 다시 공장 일을 시작했다. 전자제품 만드는 업체들에서 납땜하면서 몇몇 곳을 거쳤고 이제는 갈산역 근처 한 지식산업센터에 입주해 있는 소기업에서 부품 검수와 같은 일을 한다. 수백 명이 함께 피아노를 만들며 '으쌰으쌰'하던 소란스러운 활기는 20대쯤, 수십명 기 쎈 '아줌마'들이 관리자 총각보다 목소리 높던 40대를 지나 현재는 사장 포함해 5명 일하는 곳에서 예전보다 고요하게 노동으로 하루를 채우고 있다. 벌이는 야근, 특근 가리지 않던 2000년 후반이 제일 좋았고 지금은 최저임금의 속도를 간신히 따라잡는 수준이다.

"내 월급봉투만 가벼워진 게 아니라 남편도 그래. 육십 넘으니까 사람들이 예전만큼 안 챙겨주나 봐요. 아들, 딸도 이제 돈 벌기 시작했는데 내가 보태면 보탰지 지들은 아직 용돈 못 줘. 아,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20년 전에 집 살 때 부천이나 이런 데 아파트 샀어야 했어요. 지금 사는 데가 근처 승강기 있는 빌란데 정말 가격이 징글징글할 정도로 안 오르네. 아니 거래 자체가 없어. 요새 말 들어보니 전세사기다 뭐다 말도 많으니까 세 놓기도 힘들다네."

현숙씨는 식판에 담긴 돈가스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말했다.

"애들 키울 때는 말에요. 이 돈가스 사 먹는 것도 귀해서 집에서 빵가루 입혀서 튀겼어요. 요즘엔 물가가 올라서 아마 해 먹는 게 더 비쌀 거야. 이 식당도 말야, 한 끼 7000원이야. 요즘 세상에 이런 집이 어디 있어요. 그죠?"

과거 5000원짜리 피자 한 판으로 동료들과 파티를 벌이고 짓궂은 아줌마들 따라 나이트클럽에서 회식을 하던 현숙씨는 60대를 문 앞에 두고 식판에 담긴 음식에 다시금 의지를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듯했다. 7000원짜리 식권 한 장에 담긴 값싸고 먹을 만한 식판은 젊음의 시대를 거쳐 내일도 출근해야 할 자신을 지탱하는 '연료'였다.

그나저나, 현숙씨가 평일마다 오는 이 한식뷔페는 산단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주변 아파트단지 주민들, 부평구청 공무원들도 찾을 정도로 맛집이라고 한다. 점심엔 유명 맛집들처럼 웨이팅이 있을 정도로. 

▲장면 열여섯. 남동에서 나온 톱니, 주안 '수직 성벽'에 박히다

기획을 시작하며 만났던 남동산단의 식판들에선 숨길 수 없는 고단함이 묻어났다. 30년을 버틴 숙련공의 긍지도, 청년들이 떠나간 빈자리도 모두 남동산단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아래서 각자의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거친 쇳소리는 이제 남동의 담장을 넘어 부평과 주안의 지식산업센터로 잦아들고 있다.

인천 2호선 주안국가산단역을 나와 산단 안을 파고들면, 낡은 공장 사이 삐죽 솟은 지식산업센터들이 시야에 밟힌다. 주안산단이 '인천J밸리'로 변화를 꾀하며 세운 수직의 성벽들이다. 박종현(56·가명)씨는 그중 한 건물 1층 식당에서 만났다. 인쇄회로기판(PCB) 제조 업체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다는 그는 "일 따라오다 보니 첫 단추가 남동공단이었다"고 회상했다.

종현씨는 대학 졸업과 군대 제대 이후, 남동산단이 '남동공단'이라 불리던 1997년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10여년을 일하다 이곳 주안으로 옮겨왔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그가 거쳐온 직장은 모두 'PCB' 계통이었다. 업계 외길을 걸어온 셈이다.

"일이 많을 땐 활력도 있었고 여기저기 신축이나 증설, 입주도 많았는데 요즘은 빠지는 데가 더 많을 정도예요. 공실도 늘고…."

잡채를 한 젓가락 들어 올리며 종현 씨는 바뀐 산단 풍경을 읊었다. 업계의 시름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영향도 있고, 그게 끝나고 나서도 좋아지지는 않네요. 일 자체가 줄고 원자잿값은 많이 오르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인 거죠."

마침, 식당에 들어서기 전 복도에서 마주친 업체별 관리비 연체 공고문이 번뜩 스쳤다. '법인 회생 절차 진행 중', '경매 진행 중'이라는 붉은 낙인들. 번듯한 유리 건물 외관 뒤에 숨겨진 산단의 고단함은 연체료라는 차가운 숫자로 치환돼 있었다.

▲장면 열일곱. 응축인지, 유폐인지.

김혁권(54·가명) 사장님과는 사실, 식판이 아니라 짬뽕 한 그릇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눴다. 갈산역 인근 지식산업센터 1층은 남동산단의 골목 식당가와는 풍경부터 다르다. 깔끔하게 정돈된 복도를 따라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즐비하고, 배달기사들 출입은 끊이질 않는다. 특히 배달과 홀 손님을 동시에 잡으려는 중국집들이 유독 눈에 띈다. 어쨌든, 구내식당, 매점식당, 기사식당처럼 식판식당들이 주를 이루는 산단보다는 뭔가 돌아가는 기운을 지녔다.

"내가 아는 형님이 있어요. 20년도 전에 부천 아파트형공장에서 시작해서 결국 번듯하게 건물까지 지은 양반이야. 직원도 100명 가깝게 된다고 하더라고. 근데, 나도 그렇게 못 될 거 없거든요. 이사 온 거? 이제 2년 좀 안 됐죠."

연식은 좀 됐어도 역세권에 여전히 번듯한 건물 외관, 봄부터 가을까지 1층에는 노상 좌판이 깔릴 정도로 붐비는 이 지식산업센터를 보면서 혁권씨는 이 시대 제조업의 새로운 표준인 거 같아 묘한 뿌듯함도 있었다. 그중 본인 공간은 보증금 1000에 월세 100여만원짜리, 20여평 공장이 다지만.

"겉만 보면 호텔 같죠. 문 열고 들어가면 한 층에 수십 개 업체가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요. 이 좁은 공간에 빼곡히 들어찬 업체들을 보면 '다 나 같은 생각들 하면서 꾸려나갈 텐데' 해요. 물론 우리도 알아요. 제조업 시절은 이미 끝났다는 거. 그리고 자기 땅 없이 세 들어 사는 공장들 대부분은 마지막이 고되다는 것도."

김 사장님의 '도전'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지식산업센터의 풍경은 수치로 증명되는 차가운 현실과 맞닿아 있다. 노후한 산단을 정비하고 토지 효율을 높인다는 '구조고도화'의 명분 아래, 산단은 역설적으로 더 영세해지고 더 촘촘해졌다.

인천시 공장 등록 현황을 전수 조사한 결과, 2024년까지 부평산단 전체 1025개 기업 중 절반 이상인 550개(53.6%)가 2020년 이후에 문을 열었다. 주안산단 역시 전체 831개 기업 중 333개(40%)가 최근 4년 사이 새로 둥지를 틀었다. 겉으로 보기엔 신규 기업이 몰려들며 산단이 활력을 찾는 모양새다.

현미경을 들이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최근 4년간 부평산단에 들어선 신규 공장 중 종업원 10명 이하인 업체는 464곳으로, 신규 입주 업체의 84.3%에 달한다. 주안산단 또한 최근 문을 연 333개 업체 중 83.4%(278개)가 10인 이하의 소기업이다. 번듯한 빌딩 외관에 이끌려 들어온 기업 10곳 중 8곳은 사장님을 포함해 대여섯명의 직원이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루를 보내는 '초미세 기업'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초미세 기업'의 밀집은 지난 4편에서 만난 글로벌 전문가들의 제언과 정반대의 궤적을 그린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22@ 혁신지구'의 마르크 산스 자문관은 기술과 인재가 응축된 '혁신 밀도'가 도시 산단의 생존 열쇠라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부평·주안의 지식산업센터를 채운 것은 혁신의 응축이라기보다 임대료 부담이 먼저인 쪼개질 대로 쪼개진 공정의 파편들이다.

"산단 고도화가 노동자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와 삶의 질 향상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했던 일본 고이소 슈지 교수의 주장과도  결이 맞지 않는다. 산단 체질 개선이 결국 현장 노동자의 밥상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그의 통찰은, 최저임금 속도를 겨우 뒤쫓으며 '가장 싼 선택지'를 찾아 식판을 채우는 현숙씨의 현실 앞에서 무력해질 뿐이다.

과거 삼익악기 같은 향토 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해 수천명의 노동자를 한 울타리에서 품으며 지역 경제의 기둥 역할을 했던 시절은 저물었다. 지식산업센터라는 거대한 '수직 산단'이 들어서며 토지 이용 효율은 높아졌지만, 그 안의 제조 공정은 파편화됐고 고용의 밀도는 낮아졌다. 수도권 외곽의 영세 기업들을 깔끔한 시설과 낮은 진입장벽으로 유인해 밀집시킨 결과다.

옆집의 옆집들, 윗집과 아랫집과 다닥다닥 꿈을 꾸는 사장들. 이들에게 지식산업센터는 도약의 발판일까, 아니면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마지막 막다른 골목일까.

/김원진·정혜리·홍준기 기자 kwj7991@incheonilbo.com

/그래픽 이연선 기자 yonsony@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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