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처 겪은 동남아와 한국 … 문화교류로 길 넓힐 것"
인도네시아作 '시가렛 걸' 등
동남아문학총서만 7권 발행
문학·미술·학술까지 확대
"한국은 동남아와 서로 연결
예술 교류 가교 역할 할 것"

'시가렛 걸'이란 제목의 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인도네시아의 전통 담배 '크레텍'을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여성은 담배를 말기만 할 뿐, 향을 제조할 순 없다"는 뿌리 깊은 금기를 부수고 크레텍 조향의 전설로 남은 한 여성의 생애를 다룬다.
크레텍을 둘러싼 두 집안의 난수표 같은 암투가 인도네시아의 근대사와 맞물리는 '시가렛 걸'은 2023년 넷플릭스 공개 당시 글로벌 톱10에 올랐고,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콘텐츠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대중과 평단을 동시에 매료시켰다.
'시가렛 걸'은 인도네시아 대표 작가 라티 쿠말라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는다. 쿠말라의 이 소설이 최근 한세예스24문화재단 '동남아시아문학총서' 시리즈로 한국에 출간됐다. '변방의 문학'처럼 소외돼 왔던 동남아 문학의 한국 출간 배경에는 출판, 미술, 학술, 음악 분야에서 동남아와 한국의 가교를 자임해온 한세예스24문화재단의 백수미 이사장의 노력이 있었다.
'동남아 예술과 한국의 접점'을 키워드로 백 이사장을 최근 서울 여의도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시가렛 걸'은 드라마로 먼저 본 뒤 소설을 읽었는데, 남성 중심의 담배공장에서 여성이 주체로 거듭나는 스토리라인이 매력적이었어요. 문학은 한 나라의 시대적 배경과 사람들의 생각을 텍스트로 응축하는 장르잖아요. 해당 국가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적 맥락을 확인하려면 그 나라의 소설을 읽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봐요."
동남아시아문학총서는 지금까지 총 7권이 출간됐다. 태국 지식인이자 런던타임스 기자로 활동했던 아깟담끙 라피팟의 '인생이라는 이름의 연극', 필리핀 최고의 문호로 통하는 닉 호아킨의 대표작 '배꼽 두 개인 여자', 베트남 소수민족 작가 도빅투이의 '영주' 등이 총서의 결실이었다. 유럽과 미국 위주의 서구문학에 익숙한 우리에게 동남아시아는 '덜 읽힌' 세계라는 생각이 총서 발간으로 이어졌다.
"동남아 국가들은 20세기 피식민 경험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에 역사적 상처와 근대화 궤적, 독립 이후의 혼란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고요. 재단의 비전이 한국과 아세안이 함께하는 지속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에 문학과 예술 안에서 먼저 유기적인 연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문학과 예술은 보지 못한 세계를 만나는 일이잖아요. 예술은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내죠."
한세예스24문화재단은 문학뿐 아니라 미술 전시 교류도 이어오고 있다. 인도네시아, 태국, 미얀마, 필리핀, 말레이시아의 미술 작품이 한국을 찾는 '국제문화교류전'이다. 작년엔 태국 작가 28인의 작품 100점이 서울을 찾았고, 내년엔 인도네시아 대형 설치작가 20여 명의 작품을 소개한다. "미술은 입체적인 시각언어를 통해 감정을 공유한다. 이해와 공감이 '직관' 위에 세워진다는 점에서 언어가 다른 동남아 미술은 한국도 연결될 수 있다"고 백 이사장은 덧붙였다.
재단은 이화여대, 예일대, 컬럼비아대가 함께 참여하는 학술대회도 후원한다. 학술대회의 주된 주제는 '동남아시아 문화예술사'다. 백 이사장은 "2023년 학술대회에 참석한 예일대 석학들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천마도'를 보며 탄성을 터뜨리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며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 10년간 지속해 왔는데, 아시아 인문학 지평을 넓히고 동남아 연구가 더 활발히 이어지기를 바라기에 후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이사장이 세계 문화 교류의 중요성을 체감하는 이유는 성악을 전공하면서 '인간의 감정이 공유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숱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재단 이사장 취임 후 그가 '한세 클래식 리트(Lied·독일어로 가곡이란 뜻)'를 시작한 것도 공감과 연결의 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백 이사장의 초청으로 유명 바리톤 베냐민 아플이 작년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롯데콘서트홀에 서서 가곡 '오빠 생각'의 "듬뿍 듬뿍"을 한국어로 발음할 때엔 박수가 터져 나왔고, 백 이사장 스스로도 전율했다.
"공공기관의 국제 문화교류 사업은 보편적 접근성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고, 그와 반대로 시장은 경제적 논리를 중시할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민간 재단은 명확한 방향성을 확보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집중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순한 일시적 후원을 넘어서서 '문화적 가치'를 실현하는 게 재단의 목적입니다. 그게 재단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요."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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