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자금 7000만 원으로 감행한 도박, 대박났다” [인터뷰]

고승희 2026. 3. 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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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별발레컴퍼니 윤별·이은수 인터뷰
사비 투자한 발레 ‘갓’ 전석 매진 기록
숏츠의 시대 겨냥…2030 관객 환호
28·29일 마포서 공연…5월부턴 해외로
발레 ‘갓’ 윤별(오른쪽) 윤별컴퍼니 대표와 이은수 발레리노가 ‘갓’의 공연을 앞두고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머리 위에 살포시 얹힌 우아한 선. 화려한 나뭇잎을 겹겹이 쌓아올린 조형미, 위풍당당한 사대부가 쓰던 정자관을 ‘발레 아이돌’이 썼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 기다란 곰방대 끝까지 세속적 탐욕이 배어 나온다. 무관의 위엄을 품은 붉은 주립 아래에선 해사한 얼굴이 고개를 든다. 남성들의 상징인 ‘흑립(검은 갓)’, ‘사자보이즈’(‘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모태인 그 갓 아래로 아름다운 발레리나들의 곡선이 섬세함을 드러낸다. “갓을 남자만 쓸 이유가 있냐”며 시도한 파격이다.

‘갓’은 발레계의 비트코인 같다. 지원금 2000만원에 결혼자금 7000만원까지 털어넣어 만든 이 작품, 결국 대박이 났다. 양대 발레단(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의 무대가 아님에도 윤별발레컴퍼니의 ‘갓’은 등장과 동시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제대로 사고를 쳤다.

태동은 2021년이었다. 드라마 ‘킹덤’으로 ‘갓’이 글로벌 아이템으로 부상하던 때, 발레리노 윤별(32)은 안무가 박소연의 제안으로 ‘여(女)흑립’ 파트를 탄생시켰다. 3년 뒤인 2024년, 70분 분량의 발레 ‘갓(GAT)’이 세상에 나오자 발레계가 발칵 뒤집혔다.

“처음엔 티켓이 너무 안 나가 고민이었어요. 어떻게 할까 고심하다 지금은 ‘릴스의 시대’이니, 릴스를 통한다면 ‘공짜’로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댄스 필름을 찍었어요.”

‘스테이지 파이터’(엠넷)로 인기를 얻어 아이브 장원영과 ‘마마’ 무대를 꾸몄던 강경호가 5초 정도 등장한 이 릴스는 하룻밤 사이 X(옛 트위터)에서 터져 버렸다. 그 땐 ‘스테이지 파이터’ 출연도 전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매진”을 기록한 ‘사건’이었다.

최근 서울 양재동에서 만난 윤별발레컴퍼니 단원 이은수(25)는 “단장님과 안무가님을 향한 신뢰가 있었기에 신작의 성공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뽑아내고자 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이 작품의 초연부터 출연한 터줏대감이다.

‘갓’이 돌아온다. 초연 이후 피켓팅 대란을 불러온 화제작. 전국투어를 시작하며 한 지역에 단 한 곳의 공연장에서만 무대를 올린다는 철칙인 만큼, 빈 좌석을 찾기는 더 힘들다. 이번엔 마포아트센터(3월 28~29일)가 낙점됐다. 이곳은 초연 당시 대관 신청을 했다가 탈락한 곳인데, 지금은 ‘기획 공연’을 함께 하자며 먼저 손을 내민다. ‘금의환향’이자 ‘전세역전’이다.

발레 ‘갓’ 윤별(오른쪽) 윤별컴퍼니 대표와 이은수 발레리노가 ‘갓’의 공연을 앞두고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이건 마음에 들걸?”…7분에 한 번씩 도파민 터지는 ‘갓’

발레 ‘갓’은 약 7~8분 단위, 총 10개의 옴니버스 구조로 진행된다. 바야흐로 ‘숏폼’ 시대에 제격이다. 여흑립과 주립, 정자관, 삿갓 등 각양각색, 계급과 상황에 맞춰 쓰던 온갖 갓이 등장한다. 윤별 단장은 “갓을 만들며 이렇게 많은 갓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아직도 할 게 무궁무진하다”며 웃는다.

발레는 전통적으로 마니아가 많은 장르다. 발레 관객의 연령대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갓’의 관객은 20~30대가 중심이다. 발레 공연장에선 흔치 않은 풍경이다.

“트렌디함이었던 것 같아요. 저와 박소연 안무가가 원한 것은 미니멀하고 트렌디한 춤이었어요. 감정과 스토리를 배제하고, 직관적으로 보기 편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윤별)

윤별은 때론 직관이 서사를 이긴다고 봤다. 그는 “어떤 한 순간이 전체를 지배하면, 사람들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다”고 말한다. 인트로를 시작으로 총 9개장은 큰 ‘호불호’가 갈리지 않도록 구성했고, 어느 한 장이라도 다양한 취향의 마음을 훔칠 수 있도록 춤을 짰다. 다인원 아이돌 그룹의 전략과 비슷하다.

“발레계 오마카세죠. 무엇보다 요즘은 도파민의 시대잖아요. ‘갓’은 75분간 9개의 다른 결을 보여주고, 하나의 장마다 각각의 기승전결을 볼 수 있도록 완결성을 갖췄어요.” (윤별) 한 마디로 숏폼 버전의 발레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발레 ‘갓’ [마포문화재단 제공]

안무가에게 무용수는 영감의 원천이다. ‘갓’의 뮤즈는 이은수였다. 윤별은 “이은수 무용수는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밖으로 꺼낼 수 있는 창고 같은 존재”라며 “만약 이은수 무용수가 없었다면 ‘갓’은 정말 단순해졌을 것”이라고 했다. 이은수가 바로 ‘갓’ 자체였다.

안무가의 머릿속을 유영하는 상상 속 춤은 이은수의 몸을 통해 실체가 된다. 아무리 고난도의 춤이라도 출중한 재능과 기량의 이은수는 두 사람의 상상 이상의 몸짓과 움직임을 펼쳐준다. 단점은 이은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은수에게 ‘갓’은 다양한 감정과 테크닉을 풀어낼 수 있는 춤의 보고다. 그는 “정자관은 무거운 느낌으로 집중하면서도 섬세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춤이라면, 패랭이는 빠른 음악 안에 역동적 움직임이 많아 활발하면서도 스태미너적으로도 힘든 작품”이라고 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는 보부상의 머리 위에 얹어진 작고 귀여운 패랭이 파트에 대해 그는 “실제 성격과도 잘 맞아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춤”이라고 했다.

두 사람의 인연이 깊다. 첫 만남은 2010년. 일곱 살 차이의 둘은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에서 처음 만났다. 윤별이 16세, 이은수가 9세였다. 윤별은 “귀엽고 깜찍했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폭풍성장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무용수는 하나만 잘 해도 성공한 무용수라고 하는데, 은수는 다 갖춘 육각형의 무용수가 얼마나 좋은 무용수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발레단을 이끄는 입장에선 이렇게 골고루 잘하는 무용수가 있다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라고 했다.

이은수는 윤별을 ‘대장’이라고 부른다. 그는 스페인국립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다 윤별발레컴퍼니가 창단할 즈음 한국으로 날아와 오랜 형이자 ‘대장’의 오른팔이 됐다. 그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항상 느끼는 건 (윤별) 형만이 가지고 있는 폭발력과 강렬한 에너지를 배우고 싶다는 점”이라며 “제가 가지지 못한 부분들을 갖고 있다. 여전히 너무나 멋있다. 무용수로 만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도 강단과 추진력이 굉장해, 우두머리에 걸맞는 사람”이라고 했다. 첫 인터뷰라는 이은수의 생생한 표현력(우두머리)에 함께 듣는 윤별은 “리더라고 해달라”며 웃었다.

발레 ‘갓’ 윤별(오른쪽) 윤별컴퍼니 대표와 이은수 발레리노가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발레계 스타트업’ 윤별발레컴퍼니...달라도 너무 다르다

남들은 발레계의 ‘초우량주’이자 ‘스타트업’이라 부르고, 윤별과 단원들은 ‘회식으로 만든 왕국’이라고 칭한다.

“저희가 진짜 회식을 많이 하거든요. 근데 술 마시고 끝나는 회식이 아니라 조명 하나, 동작 하나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회의예요.”

윤별발레컴퍼니의 ‘회식’은 친목 그 이상의 시간이다. 창작과 경영이 뒤엉킨 전장이다. 이곳에선 단장이 가장 많이 ‘책임’지고, 단원들이 가장 많이 발언한다. 위계보다 밀도가, 형식보다 결과가 우선이다.

평균 나이 26.5세. 창단 2년차 윤별발레컴퍼니는 불과 몇 년 사이 가장 눈에 띄는 발레단이 됐다. 국공립 단체나 유서 깊은 발레단과 비교해 신생 단체에선 재능있는 남성 무용수를 영입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윤별발레컴퍼니는 대표인 윤별을 비롯해 ‘발레계 아이돌’이 즐비하다.이은수는 물론, 윤별과 최소 10년 이상 인연을 맺은 무용수들이 하나둘 모였다. ‘스테이지 파이터’ 출신으로 ‘발레돌’ 열풍을 몰고온 강경호, 김유찬, 정성욱도 윤별발레컴퍼니의 단원이다. 윤별은 지금의 성취를 있게 한 요인은 “함께 해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곳에 모인 친구들 모두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고 저와 함께 했어요. 제가 총대를 맸고, 추진력을 갖고 가야할 땐 아이들이 100% 신뢰로 따라줘요. 공격적 투자를 할 때도, ‘갓’을 만들고 엄청 달려나갈 때도 함께 달려준 친구들이에요. 미래를 걸고 실패도 자기 일처럼 생각해줘요.”

이은수는 종종 “대장, 이렇게까지 해도 되냐”며 걱정한다. 아직 단원들에게 월급은 주지 못하지만, 프로젝트마다 지급되는 공연 수당은 투톱 발레단보다도 높다. 무용수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성공은 같이 나눈다”는 윤별의 경영 철학이다.

생계는 예술가에게도 지울 수 없는 무게이나, 이들의 성취와 유대는 현실적인 보상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무용수들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이은수는 “항상 같이 작업할 때면 늘 즐거웠다”고 말한다.

“무대에서 새로운 춤을 춘다는 것이, 설레고 즐거워요. 클래식 파드되를 할 때면 너무 오래 똑같은 것을 하다 보니 설렘이 사라졌는데, 이곳에서의 작업은 늘 심장이 뛰어요. 2024년 ‘갓’ 무대가 70분 분량으로 초연됐을 때,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울렸어요. 생애 첫 콩쿠르였던 2010년 YGP 콩쿠르 나갔을 때 만큼의 떨림과 짜릿한 긴장감이었죠.” (이은수)

윤별은 그 자신이 무용수이면서 안무가이고, 하나의 발레단을 이끄는 수장인 만큼 누구보다 단원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게다가 비슷한 세대이다 보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것을 간파했다.

윤별은 “안정보다는 도전, 심장이 뛸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다들 와줬다”며 “안정적인 지원을 해줄 수 없으니 이들에게 심장이 뛸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예술가로의 원동력을 삼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단체가 돼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은수 역시 “첫 직장이었던 스페인 단체는 월급을 받아 안정감이 있었지만 지루했다”며 “다이내믹하게 살고 싶었고,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곳보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곳에서 무용수로 춤을 추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단원들에게 윤별은 비를 막아주는 우산이고, 내달리다 쉴 수 있는 그늘이다. 이은수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먼저 말하지 않아도 물어본다. 형은 제게 내비게이션 같은 사람”이라며 “제가 길을 잃으면 찾아준다. 형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다”고 진심을 전했다.

발레 ‘갓’ 윤별(오른쪽) 윤별컴퍼니 대표와 이은수 발레리노가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의 연습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이젠 ‘역수출’, “한국의 얼과 한의 정서라면 우리가 제일 잘 한다”

결혼 자금까지 탈탈 털어 무대에 올렸던 ‘갓’은 이제 윤별에게 “결혼하게 해줄 작품”이 됐다. 위험 부담을 안고도 뛰어드는 ‘대장’의 모습을 보면 이은수는 “(대장이) 자기 인생을 거는 걸 보니, 우리도 같이 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지금이야 윤별과 ‘갓’의 성장만 보이지만, 사실 이 길로 오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았고, 숱한 각오와 다짐이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공동 운명체’가 된 이들의 길은 서로가 서로에게 “긴 터널 속에서 발견한 한 줄기 빛”이었다. 이은수는 “우리는 같이 성장하고 크는 팀”이라고 말한다.

윤별이 단원들에게 다짐처럼 했던 말은 추동엔진을 달고 현실로 돌아왔다. ‘갓’ 초연 당시 “전국투어를 해보겠다”는 포부는 지난해 6개 도시의 투어, 99%의 객석 점유율의 기록으로 남겨졌다. 이제 윤별 단장의 시선은 한국 밖으로 향한다. 목표는 ‘역수출’이다.

서양에서 시작된 발레를 한국의 서사와 감정으로 재해석하고, 다시 세계로 내보내는 것. 윤별과 안무가 박소연의 오랜 꿈이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의 성공 공식과 닮았다. 전국투어를 이어가고 있는 현재, 중간 중간 해외 투어가 성사됐다. 5월에 태국, 베트남을 시작으로 9월엔 홍콩, 11월엔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결국 ‘발레 본토’로 가는 것이다.

윤 대표는 “아는 곳이 하나도 없어 전 세계 극장 70여 곳에 직접 이메일을 보냈다”며 “긍정적인 답변과 조건이 맞는 곳을 중심으로 투어를 추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내년에는 초청 공연을 목표로 한다.

“우리가 영국 로열 발레단이나 파리오페라발레보다 ‘백조의 호수’를 잘할 수는 없어요. 대신 한국의 얼과 한의 정서가 들어간 발레라면, 우리가 제일 잘할 수 있어요. 50년도 되지 않은 한국 발레에 한국적인 정서를 입혀 다시 세계로 향하고 싶어요.” (윤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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