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미터 한지 두루마리 박사논문, 340년 된 英 박물관 영구 소장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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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원 철학을 인공지능(AI) 시대 감각 회복의 대안으로 제시한 길이 10미터짜리 한지 두루마리에 쓴 박사논문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박물관의 영구 소장품이 됐다.
KAIST는 이진준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의 옥스퍼드대 박사논문 '빈 정원'이 영국 애쉬몰린 박물관에 한국 현대 작가 최초로 정식 구입돼 영구 소장·전시된다고 26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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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원 철학을 인공지능(AI) 시대 감각 회복의 대안으로 제시한 길이 10미터짜리 한지 두루마리에 쓴 박사논문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박물관의 영구 소장품이 됐다.
KAIST는 이진준 문화기술대학원 교수의 옥스퍼드대 박사논문 '빈 정원'이 영국 애쉬몰린 박물관에 한국 현대 작가 최초로 정식 구입돼 영구 소장·전시된다고 26일 밝혔다.
애쉬몰린 박물관은 1683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대학 박물관이다. 프랑스 루브르보다 110년, 대영박물관보다 76년 앞서 문을 열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거장의 작품을 소장한 이 박물관이 생존 작가의 박사논문을 정식 구입해 영구 컬렉션에 포함한 것은 이례적이다. 학위 수여 후 5년간 독립적 심의를 거쳐 예술·학술적 가치를 인정하고 구입을 결정했다.
이진준 교수의 논문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실제 정원 대신 마음속에서 상상으로 가꾸던 '의원(意園)' 개념을 현대 디지털 기술로 재해석한 작품이자 연구다. AI와 데이터가 넘쳐나는 시대에 기술을 넘어 인간의 감각과 기억을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논문은 '데이터 가드닝'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대신 정원을 가꾸듯 천천히 다루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속도와 효율 중심의 디지털 환경에서 인간의 감각과 사유를 회복하자는 접근이다.

논문 형식 자체도 독특하다. 10미터 한지 두루마리로 제작돼 독자가 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몸을 이동하게 된다. 동아시아 정원의 '거닐기'를 논문 읽기라는 행위로 체험하도록 설계했다. 논문은 총 9개의 두루마리로 제작됐으며 하나가 애쉬몰린 박물관에 소장된다.
논문은 2020년 옥스퍼드대 순수미술 철학박사 심사에서 만장일치로 '수정 없음' 판정을 받았다. 2년 6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마친 것으로 900년 역사의 옥스퍼드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다.
애쉬몰린 박물관의 중국·한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셸라그 베인커 옥스퍼드대 교수는 "재료와 기법, 문화적·지적 지식의 폭과 깊이, 다양한 공간을 제시하는 복합적 구성 등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고 평가했다.
이진준 교수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공중파 방송국 PD로 활동하다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 편입해 학·석사를 마쳤다. 이후 영국 왕립예술대학(RCA) 석사와 옥스퍼드대 순수미술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KAIST에서 예술가로서는 처음으로 전임교수에 임용됐으며 현재 옥스퍼드대 엑시터칼리지 방문교수, 뉴욕대 겸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진준 교수는 "AI 시대에도 예술은 비물질적 이미지에만 머물 수 없다"며 "데이터를 넘어 인간이 몸으로 경험하고 사유하는 새로운 감각 체계를 제안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서구 지성사의 대표적 박물관에 보관되면서 동양적 사유가 AI 시대의 새로운 감각 체계를 잇는 기준점으로 지속적으로 읽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임정우 기자 jjw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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