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 규모와 대상, 원칙 갖고 정하라[안종범의 나라살림]

최은영 2026. 3. 26.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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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분쟁 여파에 25조 규모 '전쟁 추경' 추진
추경 불가피한 측면 있지만 재정 악화는 우려
자영업·중기 중심 정확한 규모 정하고
불필요한 보편적 현금 살포는 반드시 피해야

[안종범 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정부와 여당이 이른바 ‘전쟁 추경’으로 25조원 규모의 추경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재정에서 ‘전쟁’이라는 표현은 신중해야 한다. 강한 정치적 수사는 판단을 흐리고 재정 원칙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번 추경은 무엇보다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국가재정법 제89조는 추경 편성 요건을 엄격히 제한한다.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 경기침체 등 대내외 여건의 중대한 변화, 또는 법률상 의무지출의 증가에 한정한다. 따라서 현재 상황이 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중대한 변화’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입증을 선행해야 한다. 재원 문제는 더 엄격하다. 국가재정법 제90조는 세계 잉여금의 사용 순서를 규정하고 있다. 제2항과 제3항에 따르면 지방교부세 및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정산과 채무상환을 우선하고 잔여분만 추경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초과 세수로 생긴 세계 잉여금은 ‘남는 돈’이 아니라 채무를 먼저 줄이는 재원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추경은 ‘필요하니 하자’는 방식으로 반복돼 왔다. 2006년 국가재정법 제정 이후 2025년까지 총 18차례 편성됐다. 같은 기간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는 5회 안팎에 그치며 추경을 제한적으로 시행했다. 한국은 사실상 추경이 상시 정책수단이 됐다. 시점도 문제다. 전체 18회 중 12회가 3월에서 7월 사이에 집중됐다. 동시에 정부는 매년 예산의 60% 이상을 상반기에 조기 집행했다. 결과적으로 상반기에 예산을 몰아 쓰고 다시 상반기에 추경까지 편성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국회에서 본예산을 통과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산을 늘리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이는 애초 예산심의가 충분하지 않았거나 재정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예산은 1년 단위 국가 운영계획의 핵심인데 불과 몇 달 만에 이를 수정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이는 재정 운용의 신뢰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우리 재정상황은 역대 최악 수준이다. 국가채무(D1) 비율은 2024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46.1%에서 2026년 51.6%로 상승할 전망이다. 2년 사이 5.5%p 증가다. 중앙정부 채무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방정부까지 포함한 일반정부 부채(D2), 공기업까지 포함한 공공부문 부채(D3)를 함께 봐야 한다. 2024년 기준으로 D2는 GDP 대비 49%대, D3는 68% 수준이었는데 이번 추경이 없어도 2026년에 각각 D2가 50%를 넘어 중반대로, D3 역시 70% 수준에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일반정부 부채가 2030년께 60%를 넘어설 것으로 경고했을 정도다. 이는 한국 재정이 단순히 관리 가능한 수준을 넘어 구조적 부담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전쟁은 없지만 재정은 이미 전시처럼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더 우려되는 점은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지금 한국 경제는 수출과 내수가 분리된 구조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와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수출 호조가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고 이에 따라 주식시장도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경제 전체의 상황을 가리고 있다. 실제 내수는 여전히 침체 상태다. 민간소비 증가율은 1~2%대에 머물고 있고 건설투자는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즉, 수출과 주가가 만들어낸 착시가 내수 침체를 가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정책 판단에 위험한 신호를 준다. 경제가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기 때문에 재정 확대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금리 상황도 내수를 압박하고 있다. 기준금리는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고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체감하는 금리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가계부채 역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환율 상승은 수입물가를 자극하며 내수 기업의 비용 부담을 키우고 있다. 특히 약 800만 명에 이르는 자영업 부문은 내수 침체와 고금리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연체율 상승과 폐업 증가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구조적 생계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 측면에서도 구조적 압력이 나타나고 있다. 석유화학 산업은 글로벌 공급 과잉과 수요 둔화로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고 건설업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리스크와 미분양 증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기순환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의 신호다.

이번 추경은 분명히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엄격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번 추경은 성장을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수 붕괴를 막기 위한 방어적 추경이어야 한다. 핵심은 방향이다. 우선,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을 최우선해야 한다. 이들은 내수 침체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이며 동시에 경제의 가장 취약한 고리다. 금리 부담 완화, 채무조정, 소비 유도 정책 등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중소기업 지원이 필요하다. 중소기업은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고용의 기반이다. 이들의 유동성 위기는 곧바로 고용 위기로 이어진다. 산업 지원은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석유화학이나 건설과 같은 구조적 어려움을 겪는 산업에는 단순한 재정 투입이 아니라 구조개선과 경쟁력 강화를 병행해야 한다. 반대로 경계해야 할 것은 보편적 현금 살포다. 이는 단기 효과는 있을 수 있지만 재정 부담만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추경은 소비 확대가 아니라 붕괴 방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추경 논의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규모다. 정치적 필요, 경기 상황에 대한 주관적 판단, 그리고 재정 여력에 대한 느슨한 해석이 결합하면서 추경 규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동안 추경은 규모를 먼저 정해 놓고 그에 맞는 사업을 끼워 넣는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추진하면서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방만한 사업들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국가재정법 원칙에 따라 세계 잉여금에서 정산과 채무상환을 우선 반영한 뒤 실제 활용 가능한 재원을 기준으로 규모를 설정해야 한다. 동시에 필요한 사업을 먼저 발굴하고 그 재원을 합산해 규모를 정하는 보텀업(bottom-up)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번 추경마저 원칙 없이 추진한다면 이는 정책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재정 확장 사례가 될 것이다. 법적 요건과 재정 원칙에 따라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를 엄격히 따져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의 과장이 아니라 원칙에 입각한 절제된 재정 판단이다.

최은영 (eun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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