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스타인 파일에서 시선 돌리려 전쟁 일으켰나

지난 2월27일 미국 하원 감독위원회 ‘엡스타인 파일’ 관련 청문회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증인으로 나왔다. 전직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증언하는 첫 사례로 기록됐다. 감독위원회 소속 로 카나 민주당 의원은 “빌 클린턴 사례에 따라 의회가 소환장을 발부하면 대통령은 증언해야 한다”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의회 증언을 촉구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청문회가 끝나고 열 시간도 지나지 않아, 트럼프 대통령이 승인한 미군의 이란 공습이 시작됐다.
지지층의 해외 군사개입 반대 여론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공습을 시작한 근본적 이유가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설득, 오바마 전 대통령의 이란 핵 협상보다 나은 성과 도출, 중동 석유 통제력 강화 같은 국제문제와 함께, 국내로는 엡스타인 파일 문제가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엡스타인 문제에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세계대전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엡스타인 파일은 최소 20명 이상이 피해를 당한, 미성년 성범죄자이자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에 대한 연방수사국(FBI)의 수사 기록이다. 1996년 최초의 피해 사례가 접수되었고, 2005년 지역 경찰이 수사를 시작해, 이후 FBI가 주도했다. 연방 검찰은 공소장 초안 기준으로 엡스타인의 미성년 성매매 범죄 혐의 32건을 확인했다. 그러나 훗날 트럼프 1기 노동장관을 지낸 담당 검사 알렉산더 아코스타가 주도한 형량 협상으로 두 건만 법원에서 유죄로 인정되었다. 결과적으로 엡스타인은 1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담당 검사는 범인과 ‘잠정적인 가해자’의 여죄에 대해 포괄적 면책권을 부여하며 FBI의 추가적 수사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10여 년 뒤인 2018년, 일간지 〈마이애미 헤럴드〉가 엡스타인 사건 피해자의 증언과 형량 협상의 문제점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에 FBI가 재수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2019년 엡스타인이 재구속된 후 재판을 기다리던 중 구치소에서 자살하면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수년에 걸친 FBI의 수사 자료 총 600만 쪽 중에서 절반인 300만 쪽이 지난 1월 공개됐다. 자료 공개 이전부터 공화당은 민주당 유력 정치인의 이름이 나올 것이라 공언했고, 민주당은 트럼프의 민낯이 드러나리라 기대하며 만장일치에 가까운 의결로 공개법이 통과됐다. 엡스타인 파일의 정치적 파장은 그가 사업을 위해 교류한 유명 인사들이 그의 범죄에 얼마나 연관됐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파일에는 유명 인사 수백 명이 등장하는데, 미국에서 처벌받은 사람은 엡스타인의 오랜 연인이자 공범인 길레인 맥스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벗어나자’는 트럼프와 의심하는 MAGA
법무부는 “가짜 또는 허위로 제출된 이미지, 문서 또는 비디오가 포함될 수 있다”라며 자료에 언급되었다는 것만으로 범죄행위를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각종 의혹에 대해 제대로 수사조차 하지 않았기에 당연한 결론이다. 하지만 공개된 방대한 자료 속에 충격적인 사실도 상당수 확인되고 있다. 현 영국 왕의 동생인 앤드루 전 왕자가 여성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사진, 반나체 여성과 함께 수영하고 있는 클린턴 전 대통령의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노엄 촘스키,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인 빌 게이츠 등이 엡스타인과 교류한 사진들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겼다.
지난 1월 파일이 공개된 이후, 엡스타인과 교류한 유럽의 인물들은 수사에 직면하게 됐다. 토르비에른 야글란 전 노르웨이 총리는 엡스타인과 연계된 부패 혐의로 기소됐고, 영국의 앤드루 왕자는 구속됐다가 풀려나 왕자 칭호를 박탈당했으며, 기밀 유출 혐의를 받은 전 주미 영국 대사 피터 만델슨은 상원의원에서 물러나며 경찰에 체포됐다. 10명 이상의 유럽 고위 관료가 엡스타인 파일 공개로 현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추가 수사가 이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의혹의 핵심 인물은 단연 트럼프 대통령이다. 〈뉴욕타임스〉는 엡스타인 파일에 트럼프와 관련된 언급이 5300건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둘은 15년 넘게 교류했고, 엡스타인이 범죄를 저지른 마이애미와 뉴욕은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활동공간이다. 이미 트럼프와 엡스타인이 함께 찍은 사진들이 다수 공개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자료에는 트럼프에게 심각한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추가적인 사진과 영상 자료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내용에 대한 수사 자료도 공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핵심 자료가 빠졌다는 지적에도 “이제 미국이 이 사건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며 논쟁을 종식하고자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트럼프 관련 자료는 공개되지 않았다며 모든 자료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엡스타인 파일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인터넷 보수 운동 세력의 핵심적인 관심 사항이다.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주요 세력 중 일부는 ‘딥스테이트(비밀스럽게 국가를 운영하는 집단)’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딥스테이트 해체 운동 일부에는 ‘민주당을 중심으로 인신매매, 대규모 아동 성매매 조직이 운영된다’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그 연장선에서 마가 운동은 엡스타인 파일을 딥스테이트의 비밀을 밝히고, 민주당의 민낯을 밝힐 주요한 축으로 여겼다.
지지층의 요구에 대해 트럼프 후보는 지난 선거운동 중에 파일 공개를 약속했다. 하지만 작년에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장관이 “엡스타인 파일에 트럼프가 있다”라고 언급하면서 트럼프 정부의 지지부진한 파일 공개 문제를 지적하고, 마가 지지층은 공개를 압박했다. 청년 보수주의 단체 ‘터닝포인트 USA’ 집회에서는 “(트럼프 정부에서) 음모론자는 입을 다물라는 식의 반응은 충격적”이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며, SNS에서 마가 모자를 불태우는 사진이 공유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등 떠밀리듯 공개한 자료로 마가 그룹은 여전히 분란에 빠져 있다. 바이든 정부도 못한 파일 공개를 한 트럼프에 대한 옹호론과 ‘뭔가를 은폐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론이 대립하는 중이다. 300만 쪽의 자료 공개로 엡스타인이 살아 있고, 이스라엘에서 발견됐다는 등의 각종 음모론 또한 마가 그룹에서 다시 퍼지고 있다.
트럼프의 이란 공습으로 미국 의회는 이란 공습의 정당성 논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엡스타인과 트럼프 대통령 간 관계에 대한 의혹은 남아 있다. 또한 의혹의 일부가 사실로 확인된다면, 핵심 지지층의 분열이 가속화될 수 있다. 피해자 수십 명과 그의 가족들이 여전히 목소리를 내고 있고, 자료에 근거한 각종 의혹도 쏟아지고 있다. 미국 법무부는 “(1월의 파일 공개로) 법정의무는 다한 것”이라며 추가 자료 공개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엡스타인 파일은 트럼프의 남은 임기 동안 가장 뜨거운 문제가 될 것이다.
뉴욕·양호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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