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난징, 중앙반점에서 백범과 장제스가 만났다.[중국 백범 김구 로드를 가다]


1933년 5월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국민당 주석 장제스를 만나기 위해 투숙했던 호텔이다. 장제스는 접견실에서 배석자를 물리치고 백범과 단둘이 회담했다. 이 자리에서 백범은 장제스에게 특무공작에 사용할 자금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한국 청년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킬 것을 권장했다. 이 회담 이후 1934년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국 청년들을 위한 훈련반이 개설되었고, 92명의 한인 학생이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회청교, 백범의 난징 피난처
난징 시절 백범 선생이 살았던 회청교 일대 모습. 이곳 어디에선가 백범 김구 선생이 거주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 임정 청사를 항저우에서 전장(진강)으로 옮겼다. 한층 촘촘하게 옥죄이는 일제의 압박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 주요 인사 대부분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을 위해 이 당시 난징에 자리 잡았다. 일제는 백범 살해를 위해 암살대를 파견하는 등 백범의 도피처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쓰고 덤벼들었다.

백범과 주아이바오 두 사람은 1933년부터 5년 가까이 함께 생활하며 실질적인 부부로 지냈다. 하지만 거세지는 일제의 압박을 더 버텨낼 여력이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은 1937년 일제가 난징을 침략해 오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백범은 주아이바오를 자싱으로 돌려보내고 본인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이동 경로를 따라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진릉대학교 대례당,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한 곳
현재 난징대학교 안에 있는 대례당 모습. 진릉대학교 강당이었던 대례당의 현재 이름은 '예당(禮堂)'이다.
진릉(금릉)대학교는 현재 난징(남경)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어 있다. 진릉대가 중국공산당에 의해 1952년 난징대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중국에서는 보통 북쪽에는 '베이징대학'이, 남쪽에는 '난징대학'이 있다고 할 정도로 소문난 명문대학이다.
이처럼 전통 깊은 난징의 진릉대학교는 유독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일제 강점기 여러 독립운동가가 이 대학에서 학문을 배우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진릉대학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를 꼽아보라면, 몽양 여운형과 약산 김원봉을 들 수 있다. 특히 약산은 친구인 약수 김두전, 여성 이명건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영어를 배워야겠다.' 생각하고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대학에 적을 두고 영어 공부를 하며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백범 김구는 대례당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에 함께하지 않았다. 참가자들은 임시정부와 백범의 위상을 존중하여 중앙집행위원회의 집행위원장 자리를 공석으로 두고 결성식을 가졌으나, 백범은 끝까지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위원장을 공석으로 비워둔 채, 조선민족혁명당은 서기부와 조직부가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으며, 서기부의 부장은 약산이, 조직부의 부장은 백연 김두봉이 맡았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이 우리 민족의 해외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이유는 여러 파로 갈려서 모래알같이 각기 움직였던 독립운동가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모았다는 점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인의 고조된 반일 열기가 전 중국에 몰아쳤다. 우리 독립지사들은 중국의 이러한 상황을 적절히 활용해서 우리 민족 독립에 전력을 다하고 싶었다.
민족 협동전선을 구축해 대일 항전을 극대화하자고 뜻을 모은 이유다. 1932년 11월 상하이에서 의열단과 한국독립당 등이 모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했다. 34년에는 보다 구체적 계획을 세워 난징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 2차 대회를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35년 여름 난징 진링대학 대례당에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대다수가 참여한 '조선민족혁명당' 창당대회가 열린다.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5개 단체는 해체를 선포하고 비로소 조선민족혁명당 아래 하나로 결집했다. 중국 내 조선인 반일 투쟁의 가장 큰 당이 탄생한 것이다.
창당 원칙은 분명했다. '일제 침탈 세력을 박멸해 자주독립을 완성하고, 봉건제 및 일체의 반혁명 세력을 숙청해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라고 정관에 명시했다. '소수인이 다수 인을 삭탈하는 경제 제도를 소멸하고, 평등한 경제조직을 건설한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언론과 집회, 결사, 신앙, 노동, 대규모 생산기관 및 독점적 기업의 국유화'도 정관 안에 있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독립지사들이 꿈꾼 나라가 어떤 모습이길 희망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독립지사들의 '한 마음, 한 뜻'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위원장이 공석인 상태에서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들과 함께 실질적으로 당권을 장악한 약산에 대해 민족주의 계열의 지청천, 조소앙 등이 크게 반발했다. 조선민족혁명당이 겨우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무렵인 창당 후 1개월 남짓 지난 1935년 9월 25일 조소앙과 박창세는 '한국독립당의 재건'을 선언하며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 지청천 역시 1937년 1월 2차 전당대회에서 약산이 총서기에 선임되자 결국 당을 떠났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재분열은 결과적으로 약산에게 독이 되었다. 약산이 민족혁명당 당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받아들인 최창익 등 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이 훗날 약산의 행보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이 탄생한 진릉대학의 강당 대례당은 난징대학교 정문에서 길게 뻗은 중앙대로를 지나 오른쪽으로 500미터 정도 가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중국 대학교들이 외부인의 학교 진입을 막고 있다. 나의 경우는 1993년에 난징대 기숙사에 잠을 자며 대례당을 살필 수 있었는데, 이번 답사에서는 아쉽게도 먼발치에서 난징대학교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