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연우·202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 2026. 3. 26.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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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를 고르는 방법

여행이 왜 좋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고민한다. 현실이 무료해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 모두 엇비슷하지만 딱 들어맞는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문득 서재에 꽂혀 있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를 발견했다. 페이지 곳곳의 모서리가 접혀 있고 문장들에 연필로 그은 밑줄이 있었다. 빛이 바랜 페이지를 넘기며 은연중에 내가 그리워했던 것이 이 책에 담겨 있다고 느꼈다. 오랜만에 읽으니 마치 어린 시절 소꿉친구를 만나는 것 같았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경험해본 적 없는 타국의 언어와 관습, 풍경 속에 내가 그리워했던 문장들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경험한 적 없는 것을 내내 그리워하며 산다고 하면 대부분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반응이지만, 내게는 ‘냉정과 열정 사이’를 통해서 경험한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이미지가 강렬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고등학교 시절 내내 모은 아르바이트비를 모두 털어서 이탈리아 피렌체로 떠났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나처럼 마르고 작은 아시아인을 보는 경험이 드물었는지 볼 때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간혹 북한(North)인지 남한(South)인지 물어보면 당혹스러웠다.

녹아 흐르는 젤라또를 핥아 먹으며, 미켈란젤로 언덕을 올랐다. 노을 지는 강가를 볼 때, 머리색이 노란 아이들이 비눗방울을 불며 내 옆을 뛰어갈 때, 곱슬머리의 노인이 벤치에 앉아 기타를 칠 때, 나는 잠시 소설 속 ‘아오이’가 되어 그 풍경을 바라봤다. 밀라노에서는 보석 가게를 볼 때마다 ‘쥰세이’의 시선이었던 것 같다.

여행지는 주로 내가 감상한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나라로 결정했다. 싱가포르의 장마, 베트남 바닷가에서의 한낮, 홍콩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상하이의 높은 건물들과 겨울, 삿포로의 눈 쌓인 비에이초(美瑛町). 보통은 현실과 타협하는 냉정한 행복에 만족하지만, 가끔은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불안정한 열정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그럴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연우·202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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