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고 매끄러운 AI의 본질은 동료 말고 ‘노예’?

동료 교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인공지능(AI) ‘이후’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과 토론은 한 문장으로 집약된다. 기술이 아니라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이다. 가르치는 영역과 방법은 다르지만 고민의 방향은 같다.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이제 의미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기술 자체는 앞으로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이미 대체된 분야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아직 도입되지 않은 곳도 가까운 장래에 기술이 대체될 것이라는 점에 이의가 없다.
‘안목’까지 대체하는 AI
AI에 의해 기술이 대체되면 다음 단계를 가르치면 되지 않냐고 말하지만, 쉬운 문제가 아니다. AI가 대체하는 기술은 대부분 탁월한 전문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대체되지 않는 탁월한 전문가의 가장 큰 역량은 ‘안목’일 것이다.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문제인지 아닌지 식별하고, 문제를 설정하고, 그 위상과 가치를 가늠할 줄 아는 것이 안목이다. 그런데 타고난 천재를 제외하고 이 안목은 AI가 대체한다는 ‘기술’을 연마하고 숙련하는 과정에서 습득되는 것이지 안목만을 위한 교육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AI가 기술을 대체하면 다음을 가르치면 된다는 말은 교육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안목이 거의 없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학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자료를 조사하고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다.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는 현재 AI의 조사 분류 역량은 박사과정 2년차 정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미 분류된 것을 보면서 어떤 것이 문제가 되며, 그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도 수준급이라고 말한다. 박사과정 코스워크를 마치고 난 다음에 논문을 쓰기 위해 문제 설정을 하는 단계인 셈이다.
이 상태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학교의 경제적 요구가 아니라면 굳이 ‘제자’를 둘 필요가 없다. 현장에서 제자는 그저 가르쳐지는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를 ‘보좌’하는 ‘조교’이기도 하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런 비대칭적 관계 때문에 많은 문제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학문 현장에서는 이런 도제식 수련이 제자를 전문가로 숙련시키는 가장 익숙하면서 동시에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AI가 박사과정 2년차에 해당하는 조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면 굳이 제자를 둘 필요가 없다.
사실 AI의 수행력이 연구/창작 분야 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의 큰 문제점 중 하나가 제자를 조교의 역할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넘어갈 수 없다. 제자의 위치가 조교인 것은 임시적 위치여야 한다. 연구든 창작이든 가르치는 사람이 제자를 받을 때는 곧 같은 현장의 ‘동료’로 성장한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장의 문제와 한계를 돌파할 수 있도록 함께 대화하며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자가 ‘동료’다.(여기서 AI의 역량은 현장에 따라 갈리는 것 같다. 어떤 영역에서는 이미 동료의 역할을 하고 있고 어떤 분야에서는 아직은 그 정도로 발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 교육 현장에서 제자가 동료가 되기를 기대하며 성장 과정을 함께하는 경우는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대부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연구나 창작 업적을 만들어내기 위해 조교를 써먹는 경우가 더 많다. 가르치는 사람의 자세 문제도 있지만 연구/창작 성과를 빨리 대량으로 양산해야 하는 제도적 압박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제자가 동료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돌보기보다 자기 성과를 내야지만 제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 화내지 않는 매끄러운 ‘동료’?
이 문제는 한국 교육 현장에서는 ‘역사적’이기도 하다. 학교 현장에서 조교를 넘어 동료로 성장해온 경험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등 이하 과정과 학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원에서도 ‘조교’를 넘어 연구와 창작의 ‘동료’로 여겨지며 성장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대부분 조교로 착취당하면서 그것이 도제식 관계에서 전문가로 성장하는 데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동료로 여겨진 적이 없으니 교육 현장이 제자를 동료로 성장하게 하는 곳이라고 실질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보조할 조교만 있으면 된다. 이런 상태에서 AI가 훌륭하게 조교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자 ‘제자’를 ‘둬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더구나 사람 동료와 AI ‘동료’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 동료는 친절하지 않다. 반면 AI는 매우 친절하다. 이미 교육 현장에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학생에게 왜 교사나 교수에게 물어보지 않고 AI에 물어보냐고 질문했더니 정말 많이 나온 답이 “AI는 화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반복적으로 물어도 AI는 절대 화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반복적으로 질문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한다. 답하는 쪽(교사/교수나 AI)이 반복한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묻는 쪽(학생)이 반복해서 질문하게 했다고 짜증을 낸다. 교육에서 감정노동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이 관계를 마다할 사람은 거의 없다.
묻는/배우는 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까지 하는 ‘동료’, 홈이 없이 매끄럽기만 한 이 ‘동료’의 실체를 로마 사람이라면 아마 ‘노예’라 불렀을 것이다. 실제로 로마는 그리스를 정복한 다음 자신의 정신적 빈곤을 채우는 것은 그리스 노예들에게 맡겼다. 키케로는 자신의 말이 대부분 자신의 스승 노예였던 고명한 철학자들과의 ‘우정’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물론 이 노예(혹은 노예 출신) 스승들이 친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 출신 교사들이 체벌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노예는 노예였다. 노예의 삶은 전적으로 주인의 자비에 맡겨진다. 그가 좋은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자질이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호의’ 혹은 누군가를 함부로 대한다는 주변의 평판과 같은 사회적 압력 때문이다. 노예가 받는 대우는 법적 권리가 아니다. 주인이 호의를 거두는 순간 그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따라서 주인이 노예에 대해 ‘우정’이라 말하는 것은 사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공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노예 출신 ‘스승’과의 관계가 성숙하게 되면 노예 신분에서 해방해주기도 했다. 참다운 우정은 평등한 사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런 우정을 나누는 관계를 ‘동료’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예를 거느리는 삶에 대한 욕망
바로 이 점에서 동료는 친절한 관계가 아니다. 철학자 김영민은 그의 책 ‘동무론’에서 동료에 해당하는 ‘동무’를 ‘같은 것(同)이 없는(無) 사이’라고 정의했다. 흔히 말하듯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 동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그런 동료는 서로를 부패하게 만든다며 격렬히 비판했다. 대신 동무란 뜨거운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서늘하게 만드는 사이라고 말한다. 그는 연암 박지원의 “이미 친하면서도 더욱 거리가 먼 듯 한다면, 더할 수 없이 친해지게 된다”는 말을 인용하여 이런 서늘한 관계를 ‘틈의 사귐’이라 말한다. 이럴 때 같은 것이 없는 사이인 동무는 함께(同) 춤을 추는(舞) 사이가 된다.(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같은 것이 없는 둘이 함께 춤추는 하나의 무대를 만드는 것, 이것을 사랑/우정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이 친절/다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동료’를 지향하는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는 어느 순간 ‘친절함’과 ‘좋은’ 사이에서 날카로운 대립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이 아니라 ‘불친절’한 좋음을 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과제를 여러 번 공지했음에도 절대 공지를 보지 않고(많은 학생이 공지를 보지 않는다) 때가 닥쳐서야 습관적으로 직접 물어보는 학생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물어볼 때마다 친절하게 답할 것인가, 아니면 이 습관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좋은’ 선생이 될 것인가. 강의 평가와 여러 장치는 좋은 ‘선생’의 길보다는 친절한 ‘서비스 제공자’가 되기를 압박한다. 고객센터에 익숙해진 다수 학생은 선생에게 그런 ‘친절함’을 기대한다. AI의 등장은 여기에 대못을 박고 있다. AI는 결코 학생을 동료로 성장하게 하는 ‘좋은’ 선생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이고 ‘친절한’ 서비스 제공자의 길을 갈 것이다. 이 서비스의 제공자가 학교가 아닌 기업이기 때문이다. (로마 귀족들을 가르쳤던 그리스 노예 교사들은 때로 회초리까지 들었지만 AI는 결코 그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하필이면 체벌을 사례로 들어 결과적으로 체벌을 옹호한다고 독자가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결국 AI에 기대하고 충족되는 ‘친절함’의 이면에서 발견되는 것은 저마다 노예를 거느리고 사는 삶에 대한 욕망이다. 가르치는 자도 더는 제자를 받고 그를 동료로 성장시키는 기쁨이 아니라 자기 연구/창작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리하고 능력 좋은 ‘노예’를 두고 싶은 것이다. 배우는 자도 자기를 서늘하게 대하는 것을 통해 동료로 성장하게 하는 가르치는 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배움의 과정을 매끈하게 만드는 친절한 노예를 두고 싶은 것이다. 보좌하고 가르쳐주지만 언제든 내가 채찍을 아무렇게나 휘두를 수 있는 노예 동료, 노예 교사 말이다.
‘타인’을 잊어버린 삶은 ‘좋은 삶’일까
그러므로 AI 도입에 따른 교육 현장은 ‘기술이 아니라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계속해서 교육 현장이 품고 가야 하는 핵심적인 질문이지만) 다음 질문을 던져야 한다. AI 도입으로 친절한 ‘보좌’에 익숙해졌을 때 인간 서로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만약 누구나 자기감정의 쓰레기통이면서도 더없이 친절하고 유능한 노예를 서넛 두고 사는 삶이라 한다면,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 ‘타인’을 잊어버린 삶이라 한다면, 그 삶을 ‘좋은 삶’이라 할 수 있을까? 교육은 언제나 ‘좋은 삶’을 다뤄왔다.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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