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철조망에 가두어진 분단의 상상력을 넘어서자 [왜냐면]


강형철 |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시인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내 모국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음은 확실한데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환상 같은 날들이 지속된다. 나는 어리둥절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고 분명한 현실인데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다. 나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엔 정면을 보는 ‘나’가 있긴 한데. 내 앞에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티브이(TV) 화면이 가득하다. 어처구니없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170여명의 이란 초등학교 학생들 떼죽음은 벌써 지나간 뉴스다. 학살 당사자인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이 사건의 주범이 아니라고 말한다. 수십억명의 눈앞에서 생중계되다시피 전쟁을 벌인 그가 상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당당하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도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목격자인 나도 그렇고 전세계 수십억 인구들 중 그 누구도 범인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 다들 뭉개고 침묵하고 있다. 아니다. 말하고는 있지만 그 말들이 구체적인 힘으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비겁한 침묵 속에 적당히 뭉개며 모르는 척 오늘을 산다.
신동엽의 시 ‘4월은 갈아엎는 달’을 뒤적인다. ‘갈아엎은 한강 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을 가슴에 담고 기세 좋게 살아보려던 시절은 어디로 갔는가. ‘무너진 토방가’에서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것들’은 오늘 우리 현실을 정말 넘어섰는가. 이 시는 1966년 발표되었다. 60년이 지났다. 그러나 정말 넘어섰는가.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지나 최고도의 인공지능(AI) 문명사회를 맞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남북을 가로지르는 ‘가시철조망’이라니! 그런데도 이를 걷어치우지 못하고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갇힌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초현실은 누구의 현실인가.
이 질문과 상응하는 답을 모색하기 위해 ‘비무장지대(DMZ) 세계문학 페스타 2026’이 열린다. 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세계 유일의 분단 휴전지역인 비무장지대와 인근 경기 파주출판도시에서 전쟁·분쟁·혐오·차별에 저항하는 세계 작가들의 심도 깊은 대화와 교류의 장을 통해 민주주의와 평화에 대한 염원이 공유될 것이다. 물론 이 행사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침공하기 전에 먼저 기획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 한국작가회의가 공동 주최자이고 이 행사를 통해 ‘생명·평화·공존세계작가네트워크’가 결성될 예정이다. 마치 지금의 중동 전쟁을 예견이라도 한 모양새다.
행사에는 노벨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벨라루스)와 마리아 로사 로호(아르헨티나), 프리야 바실(독일·영국) 등 9명의 외국 작가와 황석영, 도종환, 정지아, 정보라, 최진영 등 한국 작가 100여명이 참여해 분단, 평화, 민주주의, 디아스포라, 마이너리티 등 다섯개 주제에 걸쳐 발표와 토론을 벌인다. 첫째날인 27일엔 50여년 동안 미군기지로 사용되다 반환된 후 역사문화공간으로 보전 중인 군사분계선 인근의 캠프 그리브스에서 개막식과 세션 행사가 진행된다. 28~29일에는 파주출판도시 지혜의 숲에서 전국 70여개의 동네책방과 출판사 등이 참여하는 북페어 ‘사이에서’를 비롯하여 각종 문화행사가 이어진다고 한다. 이번 행사가 실질적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독립출판사나 동네책방과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연계행사 또한 충실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 행사와 모임을 통해 전 지구적 전쟁과 분쟁에 대한 세계 작가들의 문학적 대응이 모색되길 바란다. 전쟁·분쟁·혐오·차별에 저항하는 세계 작가들의 실천방안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명·평화·공존을 지향하는 문학인들의 뜨거운 호소가 전세계에 타전됨으로써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으로 촉발된 이 전쟁이 조기에 종식되는 계기로 작용하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많은 시도와 꿈의 연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현실은 그야말로 하찮아 보이는 철조망도 걷어치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전히 낡은 철조망으로 분단되어 있으며 언제든 전쟁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우리의 엄혹한 현실을! 그러나 우리는 또 알고 있다. 가시철조망 앞에서 돌연히(!) 멈추는 우리의 생각과 구체적인 삶 자체를 정지시키는 황당무계한 현실을 박차고 ‘비단결처럼 물결칠 보리밭’의 원수성(原數性, 신동엽 시인이 만든 개념으로, 현재의 문명 이전의 공동체적 세계의 성질)을 반드시 회복하여 나아가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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