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누군가는 총을 쏩니다, 캉디드처럼

캉디드는 어느 날 초원에서 원숭이 두 마리가 두 여성의 엉덩이를 물어뜯으며 쫓아가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불쌍한 생각이 든 캉디드는 총을 꺼내 원숭이들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두 여성은 죽은 원숭이들을 껴안고 가슴 아프게 울었습니다. 하인 카캄보가 말했습니다. “주인님이 아가씨들의 애인을 죽인 거라고요.” “나를 놀리는 거냐, 카캄보. 그걸 어떻게 믿느냐?” “어떤 나라에서는 귀부인들한데 총애받는 원숭이도 있다는 것이 어째서 주인님께는 그렇게도 이상한 일인가요?”
이 난감한 우화는 우리의 도덕적 확신을 비틀어 풍자하고 있습니다. 캉디드는 자신이 선한 일을 한다고 확신하고 총을 쐈지만 결과적으로 악을 행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확신에 차 여기저기서 총을 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확신은 얼마나 옳을까요.
당대 모든 권력을 통렬하게 풍자하다
1759년 출간된 소설 ‘캉디드’는 출간 직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에서 금서로 지정됩니다. 이 소설이 사실상 유럽 전체를 향한 공격이었기 때문입니다. 볼테르는 이 작은 책자에서 교회와 귀족, 전쟁, 식민주의, 형이상학 등 당대의 모든 권력을 그의 무기인 익살을 동원해 통렬하게 풍자합니다.
소설은 순진한 주인공 캉디드가 모험을 떠나 세상의 진실을 깨치는 기행담입니다. 우리의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설명을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캉디드는 세상을 이해하는 분명한 설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스승 팡글로스 박사로부터 배운 낙관주의 철학입니다. 팡글로스는 “우리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세상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세상에는 걱정할 일도 불안한 일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어차피 다 잘되도록 돼 있으니까요.
캉디드는 어느 날 영주의 조카딸 퀴네공드에게 키스하다 발각돼 고향에서 쫓겨납니다. 고향을 떠난 캉디드는 포르투갈에 도착하자마자 리스본 대지진을 겪습니다. 도시는 폐허가 되었는데 교회는 이 지진에 대해 독특한 결론을 내립니다. 지진이 난 이유는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 선언하고 종교재판을 열어 사람들을 화형에 처합니다. 팡글로스는 엉뚱한 사람들이 화형되는 부조리를 목격하면서도 “악이 커지면 그만큼 선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며 자신의 철학을 고수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1755년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시민 3만 명이 목숨을 잃은 대재난에 슬퍼하며 볼테르는 추모시를 씁니다. 이 시에 대해 당대의 또 다른 지성 장 자크 루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인간이 도시에 살지 않고 야외에 살았다면 이와 같이 대규모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소의 이 말에 대해 다시 볼테르가 응답으로 내놓은 것이 소설 ‘캉디드'입니다.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이던 두 사람은 사사건건 충돌하는 숙적 관계였습니다. 루소가 원시사회를 예찬하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펴내자 볼테르는 편지에 ‘이 책을 읽으니 네발로 기어다니고 싶어지는군요'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루소와 라이프니츠를 합쳐놓은 가상 인물
낙관주의의 화신 팡글로스는 루소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를 합쳐놓은 인물입니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변신론’에서 우리는 신이 미리 설계해놓은 최선의 상태 ‘예정조화’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팡글로스는 ‘충족 이유’ ‘충만한 진공’ 같은 라이프니츠의 철학 용어를 우스꽝스럽게 사용하며 세상을 설명합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캉디드는 팡글로스의 철학에 감화되지만 막상 모험을 떠나 만나게 된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전쟁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이고 식민지 노예들은 끔찍한 노동에 시달리며 종교재판은 엉뚱한 사람들을 화형시킵니다. 캉디드는 행복해 보이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팡글로스의 낙관주의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의 섭리를 긍정함으로써 고통을 무시합니다. 사랑하는 퀴네공드가 황당하게 죽고 나서야 캉디드는 의문이 듭니다. ‘이 세계는 정말 최선의 세계일까?’
기이한 사건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다보니 독자는 현실감각을 잃게 됩니다. 가장 황당한 것은 죽은 사람이 자꾸 살아 돌아오는 전개입니다. 팡글로스는 교수형을 당했는데 시체를 해부당하고도 살아 돌아옵니다. 퀴네공드는 여러 번 죽었는데도 계속 살아서 만납니다. 여성들은 원숭이를 사랑하고 눈앞에서 죽은 사람이 자꾸 살아 돌아옵니다. 이쯤 되면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온갖 참혹한 일을 겪은 뒤 캉디드는 엘도라도라는 유토피아에 도착합니다. 아이들이 황금 덩어리를 던지며 노는 이곳은 모든 것이 풍족해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걱정이 없으니 종교도 의회도 감옥도 없습니다. 드디어 ‘최선의 세계’를 찾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캉디드는 엘도라도를 떠납니다. 사랑하는 퀴네공드가 없는 엘도라도는 캉디드에게 최선의 세계일 수 없었습니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같은 형식의 오류
여행 중 일행이 된 마르틴은 비관주의 철학에 빠져 있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배를 훔쳐간 해적이 바다에 빠져 죽자 캉디드가 마르틴에게 말합니다. “보세요. 때로는 죄가 벌을 받습니다.” 마르틴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함께 죽어야만 했을까요? 하느님은 이 사기꾼에게 벌을 주셨지만 악마는 다른 사람들을 물에 빠져 죽게 했어요.” 마르틴의 말을 듣다보면 팡글로스의 철학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마르틴은 ‘이 세계가 우리를 화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팡글로스의 이론을 반박합니다. 주인공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캉디드는 팡글로스의 낙관주의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마르틴의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모험을 끝낸 캉디드는 조금 의외의 결론에 이릅니다. 또다시 팡글로스가 장광설을 시작하자 캉디드는 이렇게 답합니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합니다.”
팡글로스가 낙관으로 고통을 무력화한다면 마르틴은 고통을 필연으로 고정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둘은 반대가 아니라 같은 형식의 오류에 속합니다. 세계에 대한 과잉 해석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 모두 조용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설 ‘캉디드’가 겨냥한 것은 낙관주의라는 철학 하나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했다고 믿는 확신 자체였습니다.
‘캉디드’는 프랑스어로 ‘순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모험에서 돌아온 캉디드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습니다. 소설에서 캉디드는 ‘나아지는 인간’을 상징합니다. 대학자 팡글로스는 끝까지 우스꽝스러운 철학을 고집했지만, 누구보다 무지했던 캉디드는 성숙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으로 거듭났습니다. 저는 캉디드의 말에서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말보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라는 앞부분이 더 인상 깊습니다. 그는 분명히 스승과 견해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스승의 의견을 의심 없이 따르지도, 정면으로 반박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그것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견을 말하는 관용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제 원숭이를 총으로 쏘던 시절의 캉디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윤리가 아닌 인식의 문제를 말하다
원숭이를 쏘던 장면으로 돌아가봅시다. 이 장면이 말하는 것은 선한 의도가 악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교훈이 아닙니다. 캉디드는 판단 이전에 이해가 틀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식을 세계의 기준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이는 윤리의 문제 이전에 인식의 실패입니다. 반면 나와 다른 사람의 상식을 상대화할 줄 알았던 하인 카캄보는 사태를 주인보다 정확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볼테르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윤리가 아닌, 인식의 문제였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캉디드 일행은 함께 작은 정원을 가꿉니다. 정원에서는 스승도 제자도 주인도 하인도 없습니다. 이곳은 계급도 강압도 없이 모두가 제 몫을 하는 평등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팡글로스와 마르틴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세상에 불행이 없는 것 같고 유튜브를 보면 세상이 곧 망할 것 같습니다. 세계를 설명하려는 욕망은 종종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볼테르는 말합니다. 세계가 어떻게 구성됐든, 네가 돌볼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그런데 왜 ‘정원’이었을까요? 정원은 실제로 볼테르가 선택한 삶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는 만년에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 근처 페르네에 정착해 정원을 가꾸며 살았습니다. ‘캉디드’의 결론은 하나의 철학이 아니라, 그가 직접 실천한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볼테르는 그곳에서 청년 캉디드를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주어진 세계에 만족하는 존재가 되지 않길, 스스로 정원을 가꿀 줄 아는 존재가 되길 희망하면서.
당대의 한 비평가는 “어떤 사람은 한 권의 작은 책을 써도 지루하지만 볼테르는 100권의 책을 써도 간결하다”고 말했습니다. ‘캉디드’는 볼테르의 정신처럼 명쾌하게 곧게 뻗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이 세상이 얼마나 슬픈 곳인지 알려주면서도 사람들을 마음껏 웃게 했습니다. 누군가를 계몽하려거든 일단 웃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볼테르에게서 배웁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확신에 차서 총을 쏩니다. 캉디드처럼, 자신이 세상을 정확히 이해했다고 믿으면서. 소설 ‘캉디드’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팡글로스가 또다시 장광설을 늘어놓자 캉디드가 말합니다.
“정말 그렇군요. 어쨌든 밭이나 갈기로 합시다.”
정주식 팟캐스트 ‘발굴독서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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