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르포]“이 강원도 산골에 김구 선생이 오신다” 소년의 기억

전정희 문화전문 기자 2026. 3. 2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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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의병장 류인석 묘소 춘천 남면 가정리를 찾은 백범 김구
ㆍ아홉 살 어린이 류연회, 태극기 그려 나루터 환영 나가
ㆍ백범, 분단 위기 속 의병장이자 스승 흔적 찾아 의지 다진듯
ㆍ고령의 김구, 걸어 이동하겠다는데도 주민들 '가마' 태워 예우

1948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무렵.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 가정국교(가정초교·폐교) 학생들에게 엄청난 뉴스가 터졌다. 백범 김구(1876~1949) 주석이 북한강과 홍천강에 가로막힌 오지마을에 오신다는 것이다. 당시 백범은 '주석님' '선생님' '영수' 등으로 불리는 민족의 지도자였다. '김구 주석'이라는 호칭이 압도적이었다. 장차 이나라를 이끌고 갈 가장 유력하고 정통성 있는 지도자로 꼽혔다.
1946년 8월 17일 고사리 손에 태극기를 들고 백범 김구 선생을 환영하러 홍천강 나루터에 섰던 류연회 어르신. 당시 나루터 자리에서 백범의 의병장 묘소 참배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전정희 기자

"동네가 뒤집어졌어요. 그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는 학교 선생님 지도하에 태극기를 그려 환영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17일 홍천강과 접한 가정리 나루터로 나가 김구 선생이 탄 똑딱선이 북한강 방향에서 오기만 눈 빠지게 기다렸어요. 태극기를 마구 흔들었어요. 어이구 말해 뭐합니까? 요즘으로 치자면 대통령 방문이었어요."

지난 22일 가정리 안터골 마을에서 만난 류연회(88) 어르신은 고사리손으로 태극기를 쥐고 만세를 부르며 백범을 환영했다. 그는 "같은 학생이지만, 장가간 형들 손을 잡고 나루터로 나갔다"라고 말했다. 스무 살 전후의 국민학생이 많았던 시절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류인석 의병장 묘소 방문을 위해 똑딱선을 타고 내렸던 홍천강 가정리 나루터 흔적. 멀리 보이는 쪽이 북한강 방면이다. 사진=전정희 기자
1946년 8월 17일 의암 류인석 의병장 묘소에서 참배하는 백범 김구. 사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인근 주민까지 죄다 나왔을 거예요. 흰옷 입은 사람들이 그 좁은 마을 길과 논 밭두렁에 가득했으니까요. 그때 마을 길이나 넓어요? 겨우 우마차 한 대 지나갈 정도였죠. 똑딱선에서 내린 김구 선생은 머뭇거리다가 가마를 탔어요. 장정 네 사람이 가마를 들고서 의암 류인석(1842~1915) 의병장 묘소로 향했어요."

가정리 나루터에서 류인석 묘소까지는 1.5㎞ 남짓. 김구는 걷겠다며 한사코 거부했지만 고흥 류씨문중과 마을 사람들이 예의가 아니라며 마을에서 공동으로 쓰는 혼사용 가마를 댔다.

"김구 선생이 일흔둘 연세셨어요. 그러니 걷기 쉽지 않잖아요. 그렇다고 그 시골길을 우마차로 모셔 덜컹거리며 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어른들이 혼사용 가마를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나죠. 저 길이에요. 저길."

류 어르신은 가정중학교(옛 가정초교) 앞 2차선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전히 부부가 함께 농사를 짓고, 소일하는 건강한 어르신이었다. 류인석 의병장의 후손이기도 했다. 류관순도 고흥류씨라며 자부심이 넘쳤다.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류인석기념관 내 주일당. 류씨문중 사당에 김구 선생이 모셔져 있다. 사진=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가정리는 고흥류씨 집성촌이었다. 한마을에 독립유공자만 12명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다. 마을 곳곳에 항일 무력 투쟁을 위한 무기제작소, 독립운동가의 생가와 묘소 등 유적지가 널려 있다.

백범의 춘천행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당대 초특급 VIP의 동선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지금도 가정리는 오지로 꼽힌다. 그런데도 굳이, 그것도 해방 1주기 행사 참석 등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오지 방문을 강행했다. 무엇보다 신탁통치 여파로 뒤숭숭했고 남북과 좌우가 격돌하던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발언(6월)으로 정국이 뒤집힌 때였다. 그런 위기 속에 의병장 묘소 참배였다.

백범은 경춘선 청평역에 내려 댐 안쪽 나루터에서 똑딱선을 탔다. 청평댐은 1944년 완공됐다. 똑딱선은 모터 동력선이었다.

백범은 인파의 환대 속에 류인석 묘소에 이르러 배향하고 제문을 읽었다.

'구(九·김구 자신을 지칭)는 후조(김구 스승 고능선의 호) 선생의 제자로서 일찍부터 선생을 앙모하여 만 가지 일생 가운데에도 항상 붙들고 나아감이 있었으니 이는 곧…이 나라에 끼친 원수는 9대에 내려가도록 갚아야 한다는 대의(大義)라. 이제는 머리는 희고 살날이 오래지 않은 몸으로 고국에 돌아와 선생의 지난 앙모를 찾으니 감회가 어찌 새롭지 아니하오리까?(이하 생략)'
8.15해방 1주년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의 강원도행 이동 경로. 경춘선 청평역에 내려 배를 타고 춘천 남면 가정리 나루터에 닿았다. 1970년대 지도이나 1946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도=국토정보지리원, 제작=전정희 기자

백범은 젊은 날 관서 유학자이자 화서학파 학맥의 고능선(1842~1922)을 만나 운명을 갈랐다. "젖을 주리던 아이가 젖엄마를 만난 것 같았다"라고 했을 정도다. 이 고능선이 1880년대 3년여간 춘성군(현 춘천시) 가정리 성재 유중교의 가정서사(柯亭書舍)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그의 동문 수학자가 동갑내기 류인석 의병장이었다.

류인석은 문신 이항로(1792~1868)에게 글을 배웠고, 유학자이자 오촌 당숙 유중교(1821~1893)에게 사사했다. 그리고 바른 것은 지키고 그른 것은 물리친다는 위정척사운동, 즉 반침략 반외세 운동에 참여했다.

그 실천으로 충북 제천에 내려가 5년여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을미사변 여파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제천, 단양, 충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고종의 밀지를 받아 한양 진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힘의 한계에 부딪히자 고능선과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객사했다. "왜놈의 나라가 된 조선에 묻지 말라"가 유언이었다.

백범은 고능선에게 위정척사의 학문을 배웠다면, 류인석에게는 위정척사를 기반한 실천을 배웠다. 백범을 '사상적 보수'로 불리는 이유를 이 두 사람에게서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스팔트 도로는 의암 류인석 묘소로 가는 큰 길. 표석 방향은 '의병훈련장, 오천 류중석의병장묘소 입구'라고 되어 있다. 사진=전정희 기자

김구는 백범일지에 살아생전 류인석을 스승으로 뵙기를 원했으나 상해 망명 등으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다 해방 후 남북 분단과 단독 정부 수립 등 반쪽 국가 위기 속에 때늦은 참배 길에 올랐다.

현재 류인석 생가터 아래 유중교를 모신 사당이자 사숙인 주일당(主一堂)이란 건물에는 류씨 유학자 3명과 함께 백범이 모셔져 있다. 류씨 문중이 감사함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날 류연회 어르신은 백범이 두루마기를 입고 똑딱선에서 내리던 나루터 흔적을 찾아냈다. 세월에 묻히고 있는 나루터는 1980년대까지 사용됐다. 다행히 잡풀이 말라 있어 시멘트 계단과 접안 콘크리트 부두가 보였다. 홍천강 물줄기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춘천=전정희 문화전문 기자 oklaka@oknews.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