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皇庄) 재고(再考)

기호일보 2026. 3. 2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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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인천 중구 개항장의 '황장(皇庄)' 표석은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이름 그대로 대한제국기 황실 재정 기구인 내장원이 관리하던 직영지임을 알리는 경계석이었다. 대한제국은 황실의 사유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1899년 내장원(內藏院)을 설치했다. 고종 황제는 호조나 탁지부 같은 국가의 공식 재정과 별개로 황실이 직접 운영하는 재원을 확보하고자 했는데 이때 관리했던 토지를 '황장'이라 불렀다. 철도, 전신, 교육 등 근대화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고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당시 내장원은 인삼 전매권, 광산 개발권과 더불어 전국의 비옥한 토지를 황장으로 편입시켜 직접 세금을 거두었다. 이때 실무를 담당한 황장감동(皇庄監董)들은 현지에서 강력한 행정력을 행사했다. 높은 고위직은 아니지만 황실의 재산을 직접 다루는 권한을 가진 '실세형 현장 관리자'였다. 특히 황장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경계를 확정하며 외부의 침범을 막는 역할을 해 현지에서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주로 황장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나 소작료를 거둬 내장원으로 보내고 황장의 경계를 관리하면서 일본인이 표목을 박는 등 외부인이 침범할 때 이를 적발하고 보고하는 것이 그들의 업무였다.

황장은 중국 명나라 제8대 황제 헌종 성화제(成化帝)때 처음으로 설치됐던 것으로 당시 황장 수입이 내무부의 가장 큰 재원이었다. 조선시대 현종, 숙종, 순조 때 기록을 보면 명나라 황장의 사례를 들어 국가 근간인 토지제도의 문란과 폐단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방 관아의 등록류 문서들을 엮은 자료인 『각사등록(各司謄錄)』(1902.4.12, 1904.10.1, 1905.2.13 및 2.15)에는 인천 '항곡(航谷)' 소재 전동, 평동, 용동 등지에 내장원 소관 황실토지인 황장이 있음이 언급돼 있다. 당시 일본이 철도부지 확보를 구실로 황장에 무단으로 표목을 설치한 사건에 대해 보고하며 이에 따른 대응 지침도 기록돼 있다.

이러한 것은 1900년 황장이 있던 전동 소재 전환국이 용산으로 옮겨가고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이 건물을 철도국 철도감부(監部) 청사로 사용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본의 무단 점유에 따른 재산권의 침해 사실에 대해 대한제국 정부가 대응했지만 군사적 명분을 내세워 실질적인 해결 없이 세금 징수조차 불가능했다. '황장'까지 일본이 조사하고 표목을 세웠다는 것은 일본의 주권 침탈이 민간 토지를 넘어 국가 및 황실 자산에까지 뻗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군사적 명분으로 황장이 무력화된 대표적 사례가 철도 부설과 관련한 경인·경부선의 경우이다. 인천 전동 뿐 아니라 용산·마포 일대 황장 침해(1904~1905)의 경우도 일본군이 러일전쟁을 이유로 군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황장 포함 지역을 무단 점유하자 내장원은 황제 직속 재산이라며 반환을 요구했지만 일본군은 전쟁 수행상 불가피하다는 것으로 점유했고 이후 조선군 주둔지, 철도 부지로 전환됐다.

인천에서는 오래전 향토 원로의 글을 통해 황장 표석의 용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황장 제61'과 '황장 제64' 표석의 존재가 알려져 왔다. 내동 내리교회 목사관 뒤쪽(혹은 성공회 축대 밑)에 있었다고 알려진 '황장 제64'는 현재 그 행방을 알 수 없지만 모두 비슷한 시기 그 일대에 세워졌던 경계 표시석의 일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내동 주택가에서 발굴돼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옮겨진 '황장 제61'의 경우 1911년 토지조사부에 그 위치인 내동 6-36번지가 화상(華商) 왕학란(王學蘭) 명의의 분묘(墳墓)로 1천542평, 밭 1천167평, 대지 62평으로 기록돼 있다. 이 부지는 1917년 개간됐고 1921년에는 소유권이 중국측으로 이전됐다가 1936년과 1938년 그리고 1953년부터 1959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7차례 소유권이 개인에게 이전됐다. 토지조사부 작성 당시 중국인의 분묘가 있었던 까닭에 화상들의 의장지(義葬地)와 관련된 표지석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황장(皇庄)의 역사적 연원이나 의미도 그렇고 조선 내 중국인들의 묘지를 '황장'이라고 한 근거나 사례는 찾을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 황장 표지석이 황실소유지였던 전동에서 인근 내동으로 옮겨졌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도 인천 개항장 곳곳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각석(刻石)들처럼 그동안의 역사적 변화와 도시개발 과정 속에 원래의 위치와는 다른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글자가 투박한 돌덩이에 거칠게 새겨진 경계석이지만 대한제국 당시 인천 전동에 '황장'이 있었던 기록을 바탕으로 '황장 제61호'의 유물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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