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봉산 언덕에 새겨진 ‘지배자의 시선’… 계단은 무엇을 내려다보았나 [알보달보 인천지역유산·(7)]

김성호 2026. 3. 2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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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청국·서구 여러나라가 설정한 조계
외국이 행정·경찰권 행사하는 ‘치외법권’
외세침탈 쓰린 흔적 서린 인천 지역 유산
계단 오르면 인천항 풍경 한눈에 펼쳐져
고급주택서 내려다보며 조선인 통제 의도
자유공원·제물포구락부 개항기 모습 간직

밑에서 올려다본 각국조계지계단. 계단을 중심으로 좌측이 일본조계, 우측이 각국조계였다. 2026.3.25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1883년 1월 1일 개항(開港)을 빼놓고 인천의 서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천 역사에서 개항을 통째로 걷어낸다면 과연 무엇이 남게 될 것인지 상상조차 쉽지 않다. 이번 ‘알보달보 인천지역유산’이 살펴볼 ‘각국조계지계단’(인천 중구 자유공원 남로 38)도 마찬가지여서 개항을 호출할 수밖에 없다. 개항은 인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극적인 변화 한 가지를 꼽는다면 바로 외국인이 밀려 들어와 인천 개항장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생김새는 비슷해도 말과 옷차림이 다르고, 또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피부색도 다른 서양인들은 당시 조선인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바다 건너서 온 이방인들이 개항과 함께 형성된 조계(租界)라는 공간에서 인천에 뿌리를 내린 것은 중대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경계…이정표

인천 중구 개항장(開港場) 일대는 산책하기 좋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걷기만 해도 좋은데, 산책을 더 흥미로운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면 각국조계지계단에 대해 미리 알아두면 좋다. 각국조계지계단이 개항장 일대에서 중요한 이정표이자 길잡이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우선 조계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조계는 외국인이 모여 사는 거주 지역을 말한다. 조계 내에서는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는 치외법권이 적용된다. 일본을 시작으로 청나라와 서양 여러 나라가 개항장 일대에 각각 조계를 설정하고 자리를 잡았다. 조계 내에서 외국인은 이방인이 아니라 주인처럼 살았다. 신분상, 재산상 권익을 보호받으며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각국 조계 평면도. /인천시 제공


1883년 일본을 시작으로 1884년 청국, 그리고 서구 여러 나라가 개항장 일대에 각각 조계(租界)를 설정했다. 일본조계와 청국조계, 각국조계 등 3곳의 조계가 그렇게 생겨났다. 각국조계지계단은 일본조계와 각국조계를 구분하는 경계에 있는 돌계단이다. 바다를 등지고 계단을 바라볼 때 좌측으로 일본조계 지역이, 우측으로 각국조계 지역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2026.3.25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이와 비슷한 계단이 또 하나 있다. 2002년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된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이다.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이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를 구분하는 경계였다면 각국조계지계단은 일본조계와 각국조계를 구분하는 선이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중국의 주택이, 다른 쪽에는 일본식 가옥이, 또 다른 곳에는 서구식 저택이 들어서며 계단을 중심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풍경을 만들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각국조계지계단은 청·일조계지 경계계단과 달리 기념물로 지정받지 못했다. 각국조계지계단은 지난해 인천지역유산으로 선정됐다. 인천시는 각국조계지계단을 지역유산으로 선정하며 “개항 초기 형성된 조계의 흔적을 보유주는 역사 유산으로, 시 기념물로 지정된 청일조계지 경계계단과 동등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를 위하여 청일조계지 경계계단처럼 시 기념물 등으로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총평했다.

■ 계단에 투영된 ‘지배자의 시선’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 전경. 2026.3.25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각국조계지계단은 승용차보다 조금 넓은 폭의 돌계단이다. 구조물에 장식적 표현 요소는 찾을 수 없었다. 보행로에 설치된 석조계단이 흔치 않았던 당시 주변 상황을 감안하면 별다른 장식이 없어도 충분히 존재감을 드러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관할 관청에서 나중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손잡이가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불필요해 보였다. 계단을 올라서니 인천항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40여년 전 이 계단을 오르내리던 이방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바다를 바라봤을까 궁금해진다.

이방인들이 개항장에 자리 잡으며 생긴 큰 변화는 낯선 모습의 건물이었다. 특히 각국조계지계단 주변에는 양관이라 불리던 근사한 서구식 건축물들이 많이 지어졌다. 해관 통역관이던 중국인 사업가 우리탕(吳禮堂)의 집, 세창양행에 근무했던 헤르만 헨켈(H.Henkel)의 집,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David W.Deshler)의 집 등이 있었다. 이 일대 즐비했던 화려한 서양 주택들은 지금은 모두 전쟁의 포화에 사라지거나 화재로 소실되거나, 개발 논리에 밀려 철거됐다.

제물포항과 가까운 응봉산 산자락에 하나같이 고급 주택이 몰려 있었다. 굳이 높은 산자락에 집을 짓지 않았으면 계단도 필요치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언덕에 형성된 주거지에서 지배자의 폭력성을 일부 읽어낼 수 있다. 백문기 건축가는 “우리 전통건축에서도 언덕에 집을 짓는 경우가 나타난다. 하지만 땅을 깎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자연 지형을 해치지 않고 지형에 배속되는 방식을 취했다”면서 “조계지의 건축은 땅을 인위적으로 절토하고 직각으로 깎아 세운 방식이어서 우리 방식과는 다르다”고 했다. 또 “당시 서구 열강과 일본인들이 응봉산 언덕배기에 고급 주택과 공공시설을 밀집시킨 것은 단순한 ‘전망’의 목적을 넘어, 조선인과 항구를 한눈에 감시하고 통제하려는 의도도 자연스럽게 깔려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방인 향수 달래던 각국공원·제물포구락부

제물포구락부 전면부. 지금은 출입구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 2026.3.25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각국조계지계단 정상부에서 언덕 위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자유공원과 만나게 된다. 인천사람들 가운데에는 ‘만국공원’이라는 옛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공원 전망데크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인천항 내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나무와 잘 정돈된 정원도 단정한 모습으로 자유공원을 찾는 손님을 반긴다. 자유공원의 옛 이름은 각국공원이다. 조계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향수를 달래는 역할을 했던 공원 시설이다. 자유공원은 ‘각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한국 최초의 공원이다. 1888년 11월 9일 미국·러시아·영국·일본·중국 등 여러 국가 외교관이 함께 서명해 설립했다. 인천부사에 첨부된 1888년 7월의 ‘인천제물포각국공동조계’ 도면에는 각국공동조계 중간 지점 고지대에 ‘Public Garden’을 배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도시계획에 반영된 최초의 공원이다. 각국공원은 1897년 조성된 탑골공원(파고다공원)보다 9년이나 앞서 조성됐다. 1914년 조계가 폐지되면서 관리권도 인천부로 이관되면서 명칭을 ‘서공원’으로 바꾸고, 1945년 해방과 함께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을 찾는다. 1957년에는 한국 정부와 인천시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면서 공원 이름이 자유공원으로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물포구락부 내부. 2026.3.25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인천항을 등지고 각국조계지계단 정상부 끝에서 왼쪽으로 향하면 인천시 유형문화유산 제17호인 제물포구락부와 만난다. 이 건물은 1901년 지어진 외국인들의 친목을 돕는 사교 클럽이다. 이곳은 단순히 술을 마시고 노는 장소가 아니라 각국 외교의 장(場)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각국조계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이 필요한 정보를 교환했던 공간이었다. 제물포구락부 내부에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등을 갖추며 서양식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옮겨왔다. 현 남부교육지원청 부지에는 테니스 코트를 조성했다. 벽돌조 2층(지상 1층, 반지하 1층) 건물로 연면적 386.8㎡다. 제물포구락부 전면 중앙 돌출부는 이 건물이 세워질 당시 출입문이 있던 곳으로 전면에는 지상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도로 개설로 계단은 철거됐다. 한국전쟁 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쓰이다 박물관이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한 뒤 인천문화원, 중구문화원, 인천문화원연합회 등이 사용했다.

자유공원과 제물포구락부는 우크라이나 출신 건축가 사바틴(Afanasy Ivanovich Seredin-Sabatin·1860~1921)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우리나라 근대건축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사바틴이 설계하거나 공사에 관여했다고 언급된 것은 인천 제물포 각국조계 지도(1888), 홈링거양행 인천지점(1898), 세창양행 사택(1890), 제물포구락부(1901) 등 인천의 건축물을 비롯해 고종의 처소이던 관문각, 주 경성 러시아 공사관, 독립문 등이 있다.

제물포구락부 공터에 세워진 각국조계 표지석 복제품. 진품은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2026.3.25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인천은 국제성을 띈 도시였다. 제물포 개항 이후 1914년 조계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인천 전체 인구에서 외국인이 40% 이상을 차지했다. 인천부사를 참고하면 1914년 인천부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만3천463명으로 전체 인구의 43.7%였다. 조선인은 1만7천366명으로 전체 56.3%였다. 일본인, 중국인이 다수였지만 소수의 영국·미국·독일·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포르투갈·러시아·네덜란드 등 여러 국가의 외국인이 인천에 살고 있었다.

조계지는 외세 침탈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곳이지만, 동시에 인천이 세계와 조우한 통로이기도 했다. 각국조계지계단을 비롯해 개항 초기 형성된 조계의 흔적을 보여주는 역사 유산을 잘 가꾸고 보전할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개항기 근대 문화유산을 인천이 아꼈으면 한다.


/김성호 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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