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아빠가 되고, 엄마의 엄마가 됐다”…‘위기아동청년법’ 시행, 그 이후는? [취재후]

손은혜 2026. 3. 2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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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쉬는 것도 죄책감이 들어요”…돌봄은 그렇게 시작됐다

"잠깐 쉬는 것도 죄책감이 들어요." 27살 오동민 씨의 말이다. 동민 씨의 하루는 돌봄에서 시작돼, 돌봄으로 끝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할머니의 상태를 먼저 확인하고, 식사를 챙긴다. 시간을 맞춰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버지를 찾는다. 진료 일정과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수속을 밟는다. 그리고 틈틈이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하지만 공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조금 쉬려고 하면 ‘이 시간에 내가 쉬어도 되나’ 그 생각이 먼저 들어요."

여든 넘은 할머니, 예순의 아버지. 할머니는 뇌경색,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 청각 장애 등을 앓고 있다. 어머니는 같이 살고 있지 않다. 돌봄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의 몫이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동민 씨는 가족을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을 ‘책임지는 사람’이 돼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동민 씨는 매우 담담했고, 참 성실했다.


■ 10만 명이라는 숫자…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아픈 가족을 돌보는 아동과 청년, 이른바 '영 케어러'라 불리는 가족돌봄 아동·청년. 정부 추산 인원만 10만 명이 넘는다. 하지만 취재할수록 느낀 건 이 숫자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통계 속에 잘 잡히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스스로를 '지원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민 씨 역시 그랬다. "국가가 보호해 준다, 권리를 준다. 그런 생각 자체를 못 했어요." 또 다른 돌봄 청년은 말했다. "잘못 태어나 버렸구나. 내 팔자가 안 좋구나. 사회적인 문제라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그들에게 돌봄은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자 내 팔자'였다. 이 지점이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

■ 2021년, 사회를 흔든 사건…그리고 뒤늦은 대응

영 케어러 문제가 처음으로 사회 전면에 드러난 건 2021년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청년이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한 사건,
이른바 '간병 살인 사건' 이후였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그동안 사회가 보지 못했던 '돌봄의 사각지대'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후 정부는 전수조사에 나섰고, 우리나라 영 케어러 규모가 10만 명을 넘는다는 결과를 내놨다. 그리고 지난해, 이들을 위한 법,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위기아동청년법)'이 제정됐다. 그리고 26일, 이 법이 시행된다. 국가가 처음으로 '돌보는 아이와 청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도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 그런데…법이 있어도 닿지 않는다

문제는 다음이다. 법은 만들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제도 밖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원을 받으려면, 직접하든 대리로 하든 '신청'을 해야 한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어디 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건 내가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구조에서는 가장 힘든 사람들이 '끝까지' 남는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경우가 많고, 정작 극도로 한계에 몰린 사람은 제도와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그래서 필요한 부분이 바로 지원 대상을 '발굴'하는 것이다. 물론 인력과 비용이 더 들고, 담당자들의 적극성이 뒤따라야 한다.

■ 11살 아이가 병원에서 가족들 상태 설명을 듣는 이유


강화도에서 만난 11살 아이. 조부모, 아버지, 삼촌, 동생, 그리고 이 아이까지 모두 6명의 대가족. 그런데 이 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의 식구가 다 아팠다. 할아버지는 심장 수술을 받았고, 할머니는 지적 장애가 있었다. 아버지와 삼촌, 동생까지 다른 가족들도 제각각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었다. 취재하러 간 날은 할아버지의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아이는 외출을 준비하고,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약을 챙기고, 가족에게 전달하고, 아픈 가족들의 상황을 견뎌내고 있었다. '보통' 아이의 일상이 아니었다. 이 아이에게 돌봄은 선택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 “아동과 청년은 다르다”…하나로 묶인 제도의 한계

이번 법은 그동안 제도 밖에 놓여 있던 이들을 정책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점만으로도 큰 진전이다. 하지만 출발부터 한계가 있다. ‘아동’과 ‘청년’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동일한 제도 안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동과 청년은 필요한 지원의 성격이 다르다. 아동은 보호의 대상이다. 학업을 지속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돌봄 부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적 개입을 통해 가족 돌봄 자체를 중단시키는 조치도 필요하다. 반면 청년은 이미 성인으로서 삶을 유지해야 하는 주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가 아니라 돌봄 부담을 덜어주고, 학업·취업·주거를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책의 접근 방식이 다른 두 집단을 하나의 법에 담으면서, 지원의 방향이 모호해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보호'와 '자립 지원'이라는 서로 다른 정책 논리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누구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라는 기본 질문에 대한 답이 흐려지면서,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 제도가 닿지 않는 방식

또 하나의 문제는 ‘전달 방식’이다. 이 제도는 돌봄청년들을 위한 지원센터를 설치해서 이들을 돕는 것을 핵심 골자로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런 방식 자체가 한계라는 지적이 나온다. 광역 시도 단위로 설치되는 '청년미래센터'는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 것인가? 전국 지자체에 이들을 돕기 위한 센터를 다 설치할 수도 없거니와, 그나마 센터가 생긴다해도 센터 하나를 이용하기 위해 장거리 이동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강원도의 경우, 강릉에 센터가 생기면 원주나 춘천에 있는 청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정작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서 닿지 못하는 제도. 우리 복지 제도의 한계다.

■ 당사자들이 서로를 돌본다


제도가 닿지 않는 사이, 당사자들은 스스로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돌봄청년들끼리 만든 자조모임에 참석했다.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위로하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고 있었다. 돌봄 청년들은 이 자리에서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 말을 가장 듣고 싶었다고. 아무도 우리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 스스로 '알아먹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어른'이 돼보고 싶었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이미 큰 위로이자 힘인 것 같았다.

■ “가족사진 한번 찍어보고 싶어요”

오동민 씨의 이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앞으로 뭘 가장 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가족사진을 꼭 찍어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들려줬다. 아파도 좋으니까, 그저 가족이 함께 모여 한 장의 사진을 찍는 것이 소원이라니. 그리고 덧붙였다. "돌봄이 추억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고통이, 훗날엔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가족 가운데 누군가 아파도, 구성원들의 삶은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개인 팔자 탓'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탓'으로. 개인의 고통을 시스템으로 나눠지는 사회가 질적으로 나은 사회다. 이번 법은 분명 의미가 있다. 이제껏 보이지 않던 문제가 처음으로 제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법은 시작됐다. 이 법이 ‘발견되지 않은 영 케어러’에게까지 가서 닿을 수 있을지. 이 제부터가 진짜 시험대다.

[더 보다] 어른이 된 아이들…돌봄의 무게 벗을까?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515077

[뉴스9] 가족돌봄청년 ‘10만 명’…법 시행 앞두고도 ‘사각지대’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51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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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혜 기자 (grace35@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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